재판 ‘방청’해본 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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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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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다닐 때 법학개론 수업을 들었다. 원하는 사건을 알아보고 재판을 직접 방청하는 게 과제로 주어졌다. 어떤 사건을 챙겼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수첩에 손가락이 아프도록 정신없이 판사와 변호사, 검사 말을 기록했던 건 선명하다. 또 기억나는 건 방청석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는 거였다. 재판이 끝난 뒤에 들어왔다고 생각할 정도로 한산했다.

대학생으로 한 언론사에서 인턴기자로 일할 때 마주한 법정 모습도 기억이 난다. 살인사건과 관련해 재판을 챙겨야 하는 날이었다. ‘널널한 마음’으로 법정에 갔는데 재판을 보려고 일찌감치 도착한 방청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전에 텅 빈 방청석을 경험했던 터라 줄까지 선 모습이 꽤 생경했다. 이후 알게 된 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재판엔 방청객이 몰린다는 거였다.

법원을 취재해 기사를 쓰다 보니 이런저런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 최근 이 기억을 조각조각 늘어놓게 된 건 한 판사와의 대화 덕분이다. 정확한 자구까지 복원하기 어렵지만 대략 이런 취지였다.

“재판하러 들어가면 방청석은 사건 관계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비어 있거든요. 재판을 공개하는 이유는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진행하겠다는 취지가 있는 건데 막상 방청석은 비어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자리를 기자들이 채울 때 ‘아, 이런 게 기자의 역할이구나’ 하고 느껴요.”

기자 역할에 대한 이해까지 담긴 감사한 말이었는데, 그보다 ‘재판을 공개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할 지점을 던져줬다는 점에서 꽤 오래 이 말이 기억에 남았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건일지라도 재판은 묵묵히 진행된다. 자신의 말을 들어줄 방청객이 없어도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 필요성을 설명한다. 홀로 노동 사건을 대리하는 변호인은 검토할 연구보고서가 많다며 기일을 더 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하기도 한다. 어쩌면 재판정은 진정으로 ‘말할 권리’가 보장된 곳이라는 생각도 한다.

요즘엔 재판정에 들어가면 주변을 더 둘러보게 된다. ‘이렇게 중요한 사건인데 너무 관심이 적군’, ‘관심을 받을 만한 사안인 만큼 방청객이 많네’ 하면서 나름대로 ‘재판 방청 기록’을 한다.

중요 사건이 그만큼 큰 관심으로 나타나는 걸 보는 즐거움도 있다. 최근 나의 관심을 끈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죽인 혐의로 사형을 당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심 개시 전 심문이었다. 심문하는 것을 보러온 방청객이 너무 많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바닥에 앉아서 봤다. 해당 재판부가 다행히 허용해줬다. 소위 ‘쪽지’가 드나들었다는 1970년대 재판정이 40여 년이 흐른 2024년 방청객들로 붐비는 가운데 진행된다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방청석을 채우러 가는 재미와 의미를 더 많은 분과 공유하고 싶다. 팬심으로 ‘티켓 오픈런’하듯 찾는 것 말고, 우리 사회 주변을 둘러볼 줄 아는 관심이면 더 좋겠다. 정치인, 기업인, 유명인 등이 연루된 각종 재판을 챙기느라 허덕이면서 혹여 놓치는 재판이 없는가 스스로 돌아보며 마음을 다잡는 말이기도 하다. 풍부하고 더 다양한 표정을 기록할 수 있겠다.

<유선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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