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작가가 오래전에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걸 먹을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껴요.” 사람 만나 얘기 나누는 걸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그로선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리고 행복은 탁월함(Arete)을 추구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탁월함에는 지적 탁월함(Theoria)과 성격적 탁월함(Praxis)이 있는데 지적 탁월함, 즉 지혜·통찰 같은 것은 배움에서 생기고, 성격적 탁월함, 즉 관용·절제 같은 덕성은 습관에서 얻어진다고 했다.
탁월함을 향해 나아갈 때 행복하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왜 인간은 탁월함을 좇으려고 할까. 답을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의 책 <행복의 기원>에서 찾았다. 사람은 언제 행복한가. 생존에 유리한 환경에서, 또는 생존확률을 높이는 일을 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일 잘하고 관계 좋을수록 생존확률 높아져
인간은 유전자의 조합이고, 유전자가 가진 단 하나의 사명은 생존이다.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고, 번식을 통해 자기 유전자를 재생산함으로써 생존을 이어가고자 한다. 따라서 생존확률을 높이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 생존확률을 높이는 일에서 행복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런 일을 기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살아남을 확률이 떨어지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니까 생존확률을 높이는 일을 할 때 그 보상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 행복이 생존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도 살아남기 위해서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못하는 사람보다 생존확률이 높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고, 밥 먹는 법, 옷 입는 법을 익혔다. 학교에 가서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직장에 들어가서 상사를 본받아 따르면서 배운다. 또한 스스로 경험하면서 알고 깨우친다.
공부는 기억을 쌓고 확장하는 일이다. 기억에는 의미 기억, 일화 기억, 절차 기억이 있다. 개념이나 공식같이 학교에서 배우는 거의 모든 게 의미 기억이다. 일화 기억은 각자의 경험에서 깨닫고 알게 된 기억들이다. 의미 기억을 많이 갖고 있으면 학교 다닐 적에 공부 잘한다는 소릴 듣는다. 의미 기억은 많지만 일화 기억이 부족하면 ‘일머리가 없다’, ‘책상물림’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학교와 직장에서 살아남는 데 가장 필요한 게 이런 기억이다. 의미 기억이 지식이라면 일화 기억은 지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절차 기억은 더 범위가 넓다. 계단을 오르고, 자전거를 타고, 수영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악기를 다루는 일 모두 절차 기억이 있기에 가능하다. 남들이 갖고 있지 못한 절차 기억을 많이 가지면 생존확률이 높아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탁월함을 말한 것도 이런 기억의 축적과 확장 아닐까 싶다. 우리는 일과 관계 속에서 산다. 일을 잘하고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생존확률이 높아진다. 기억으로 쌓은 ‘지적 탁월함’으로 일을 잘하고 관용, 절제와 같은 ‘성격적 탁월함’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면 생존확률이 높아진다. 이렇게 생존확률을 높이는 일에서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 여기까지 말하면 똑똑한 친구는 이렇게 질문한다. 인간은 생존확률을 높이는 일을 할 때 행복하고, 공부는 생존확률을 높이는 일이라고 했는데, 왜 우리는 공부할 때 행복하지 않나요? 그에 대한 답을 나는 쉰 살 넘어 공부하면서 알았다. 학창 시절 공부는 어찌 보면 관계를 해치는 공부다. 친구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친구를 이겨야 할 대상으로 두고 경쟁하는 공부를 해서 그렇다. 인간은 무언가를 알고 익혔을 때와 남과의 관계가 좋을 때 행복하다. 그런데 알고 익히는 공부가 관계를 해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므로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 서로 돕고 서로에게 배우면서 함께 알아가는 과정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각자 읽고 들은 후 자기만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읽고 들은 걸 친구에게 말하고 글로 써서 알려줌으로써 함께 시험을 잘 보는 쪽으로 방식을 바꾸면 응당 공부에서 희열에 가까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두 가지 경우에 내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했다. 그 하나는 실력이 없을 때다. 실력이 부족하면 낙오하거나 내 역할이 축소된다. 내 존재 의미를 잃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말을 삼갔다. 말을 통해 내 실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국 실력이란 것도 남의 평가와 남과의 비교에서 그 수준이 정해진다. 남들이 내 실력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면 나의 실력 없음은 내 생존확률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나는 말하는 대신 남의 말을 잘 들었고, 내 부족한 실력을 시간으로 메워서 남들이 기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그렇게 버티고 이겨냈다.
내가 위험해지는 또 하나의 경우는 관계가 나빠졌을 때다. 윗사람의 미움을 받거나 주변에 적이 많아지면 위험해진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게끔 노력했다. 남의 험담을 삼가고, 되도록 거절하지 않았다. 남들이 내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걸 어떻게든 들어주려고 했다. 이렇게 남들의 비위를 맞춰주면 관계로 인한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 먹을 때 행복감
요즘도 나는 여전히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때 기분이 좋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제는 스스로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려고 힘쓴다. 남의 평가에 기대 남의 인정을 구하며 살기에는 나이도 많고, 쉰 살 넘어서부터는 그런 인정을 구걸할 대상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장 다닐 적에 비해 행복한 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첫째,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게 있어야 한다. 둘째, 그것이 남의 반응을 유발하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 반응을 확인하고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반응이나 자신의 평가를 향상시키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향상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섯째, 나의 성장이 남에게도 도움이 되고 유익해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빠져 있을 때 ‘덕질’한다고 한다. 이런 ‘덕질’이 밥벌이가 되면 ‘덕업일치’의 삶이 되고, 또 이런 삶이 남들에게도 유용하면 그야말로 행복한 삶이 된다.
원시시대에 사람이 생존을 위협받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먹을 게 없을 때와 혼자일 때였을 것이다. 먹을 게 없으면 굶어 죽고, 무리에서 내쳐져 혼자 있으면 맹수의 밥이 됐으니까. 혼자서는 사냥하기도 어려웠다. 번식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외로움을 느낀다. 가끔은 혼자 있는 게 무섭기도 하다.
2012년 제이슨 미첼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와 다이애나 타미르 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교수가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통해 실험 참가자 195명의 뇌를 관찰했다. 그랬더니 자기 이야기를 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가 음식을 먹거나 돈이 생겼을 때 활성화되는 영역과 일치했다. 사람들은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와 같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시민 작가가 좋은 사람과 만나 맛있는 걸 먹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 건 당연한 결과다. 그가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 또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부였으리라.
<강원국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