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구는 2020년을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인구 절벽’을 경고하며, 대규모 이민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일할 사람 없으니, 수입해오자’ 정도의 단순하고 유치한 경제적 논리에 갇혀 있다. 이런 논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외국인 가사 근로자 도입’ 사업이었다. 이민 정책에 관한 최근의 논의가 보여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국은 대규모 이민을 받을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 정치인과 정책 결정권자 중 이민이라는 주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이민은 여전히 낯선 주제다.
시민인가 노동력인가?
이민은 경제적 문제이기에 앞서 정치와 사회의 문제다. 그것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수입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맞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것은 정치 공동체를 운영하는 활동이다. 이 공동체는 일종의 회원제 동아리이고, 시민은 그 동아리의 회원이다. 개인이 정해진 조건을 만족해서 회원이 되면, 다른 회원들과 함께 동아리를 운영하기 위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는다. 동아리 회원의 자격 및 이 자격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를 멤버십이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법률이 정하는 조건을 만족한 사람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시민이 될 수 있다. 시민은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 다른 시민들과 함께 정치 공동체를 운영한다. 회원에게 멤버십을 부여하는 것처럼 시민에게 부여된 시민의 자격을 시민성(citizenship)이라고 부른다.
회원이 부족하거나, 동아리 활동이 정체돼 새로운 회원을 모집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이는 ‘우리’의 일부가 될 사람, 즉 기존 회원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동아리를 함께 운영해 갈 동료를 찾는 과정이다. 이는 단지 회원 수의 증가가 아니라 동아리 공동체 자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기존의 ‘우리’가 변해야 외부인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우리’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정치 공동체가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유럽과 미국의 이민 역사를 보라. 외부인을 내부의 시민으로 맞이하면서 공동체는 본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런데 이민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동아리의 새로운 회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동아리 사무실을 청소해줄 일꾼을 구하고 있다. 정치 공동체의 새로운 시민을 찾는 게 아니라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해줄 노동력 상품을 구매하려는 것이다.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시민들의 공동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한국에는 시민과 시민의 평등한 관계는 없고, 자기 노동력을 파는 쪽과 그걸 활용하는 쪽의 관계만 있다. 그래서 한국인 노동력이 부족하면, 외국인 노동력을 수입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는 권리를 가진 시민이 아니라 노동력 상품으로만 다뤄진다.
이민 불가능 사회
정치적 수준에서 이민이란 새로운 시민을 맞이하는 과정이고, 사회적 수준에서 이민이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문화란 한 사람이 나고 자란 환경 전체를 의미한다. 한명의 이민자를 맞기 위해서는 그의 종교, 언어, 신체, 세계관, 도덕 등을 모두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같은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집단은 하나의 사회적 그룹, 서구에서 흔히 에스닉(ethnic) 그룹이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한다. 이민자가 들어온다는 것은 새로운 에스닉 그룹이 탄생한다는 의미다. 이민 정책이란 어떻게 이민자를 들여올 것인지가 아니라 이러한 그룹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관한 정책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론화된 모델이 구축돼 있어야 한다. 예컨대 미국과 프랑스는 전혀 다른 모델에 기초한다. 미국은 그룹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들 사이의 갈등과 협력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프랑스는 그런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차별과 사회의 파편화를 강화한다고 본다. 물론 지금은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격렬한 논쟁에 휩싸여 있다.
한국에는 다양한 에스닉 그룹을 다룰 이론적 모델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과 ‘외국인’이라는 빈곤한 이분법이 거의 유일한 인식 틀로 작동한다. 심지어 이민자들을 부를 이름조차 없어 ‘다문화’라는 정체불명의 말이 낙인처럼 사용된다. 이것은 ‘문화가 다양하다’는 의미일 뿐, 사람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지시하는 말이 아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차별과 평등에 관한 사회적 규범이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이다. 당장 언론 기사만 검색해 봐도 한국의 이민자 차별 사례는 차고 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인종차별이 다른 나라에 비해 더 심각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나라마다 인종차별의 형태와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합의된 규범, 특히 제도화된 규칙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민 정책의 가장 기초적인 규칙은 차별 금지다. 이 규칙이 명확히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애초에 이민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 사회적 그룹 사이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민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그중에 인종차별을 진지하게 다루는 사람은 드물다. ‘외국인 가사 근로자 도입’에 집착하는 정치인은 있지만, 차별금지법을 추진하는 정치인은 없다. 차별 행위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법률 하나 만들지 못하는 나라에서 대규모 이민 정책 운운하는 것은 실로 웃기는 일이다.
인종차별에 침묵하면서 이민 확대를 주장하는 이들의 속내는 뻔하다. 이민자를 사람이 아니라 노동력 상품으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권리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노동력으로만 취급받는 인간을 우리는 ‘노예’라 정의한다. 그들은 새로운 시민을 맞이하고픈 것이 아니라 ‘외국인 노예’를 수입하고 싶은 것 아닌가? 한국의 이민 정책은 여전히 이런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2023년 ‘인신매매 보고서(Trafficking in Persons Report)’는 이민자 강제 노동을 근거로 한국을 2등급 국가로 분류한다. 이런 문제를 말하지 않고 이민 확대를 주장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저출생과 인구 감소가 의미하는 바는 ‘미래 노동력 부족’이 아니라 한국은 인간을 낳고 키울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부족한 것은 노동력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다. 이런 환경을 갖추지 않고서, 외부인을 내부 시민으로 맞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의 재생산이 가능한 곳에서만 이민 정책도 성공할 수 있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