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새로운 재정 거버넌스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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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2월 6일 서울 서초구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열린 민생경제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2월 6일 서울 서초구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열린 민생경제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에서도, 저물어가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재정 거버넌스는 중요한 이슈였다. 재정 거버넌스는 예산 편성과 심의 및 확정, 집행, 결산에 이르는 전체적인 예산 과정에서 의회와 행정부가 재정 운영과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방식을 말한다. 예산이나 재정정책에 관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제도적인 틀과 같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헌법이 부여한 권한에 따라 의회와 행정부는 재정 운영에 참여하는데, 의회와 행정부의 각 부서 권한은 예산 과정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윤석열 정부에서도 재정 운영과 관련해 의회와 행정부는 의견이 달랐다. 현재처럼 의회가 여소야대인 경우 행정부와 의회의 의견이 크게 달라 예산과 관련된 국가 결정이 파행적으로 흘러가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위헌적인 계엄으로 탄핵당할 상황에 처한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 명분으로 야당이 다수당인 국회의 감액예산안 처리를 거론했다.

기재부 권한 지나치게 비대

예산 편성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의지가 중요한 것은 예산 배분의 큰 방향성을 결정할 때 경제학이나 다른 어떤 학문도 지침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더 많은 성장을 위해 산업지원이나 연구개발 투자를 하는 것이 나은지, 복지를 위해 보건과 교육에 더 많이 투자하는 것이 나은지에 대해 학문적으로 엄밀한 판단이 불가능해 이해관계와 개성이 다른 개별 주권자들에 의해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과정으로 예산 내용이 결정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지금까지 합의된 가장 중요한 규칙 중의 하나다. 방향성을 정하는 주권자의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통화정책의 금융통화위원회처럼 전문가들로 구성된 재정위원회를 만들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부와 국회 간의 재정 거버넌스 문제는 나라의 정치 형태, 즉 의회와 행정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느냐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의원내각제를 택하는 나라와 대통령제를 택하는 나라의 재정 거버넌스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의원내각제를 택하는 나라들은 의회의 다수를 점하는 당이, 단독으로 혹은 연합해 행정부를 구성해 예산안이 행정부에서 준비되면 이것이 의회에서 통과되는 과정에서 견해차가 크지 않다. 이들 나라의 재정 거버넌스 체계도 이러한 제도적 배경 위에서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제하에서는 의회의 다수당과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다를 수 있어 예산안 내용에 대한 의견과 시각이 양 헌법기관 사이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 대통령제 국가들의 재정 거버넌스 체계도 대통령제의 헌법 체계에 상응하도록 제도화돼야 한다.

한국은 대통령제의 헌법을 채택하고 있다. 재정 거버넌스 문제는 의회와 대통령이 예산과 관련해 시각차를 가진 경우를 상정해 고려한다. 대통령과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휘하는 예산에 대한 편성권을 인정하면서, 국회에 정보와 권능을 갖고 행정부가 제시한 예산안을 수정하고 집행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두 헌법기관의 권한과 의무는 ‘공공복리 극대화’라는 관점에서 균형을 이뤄야 한다.

현재 예산 과정에서는 행정부와 행정부 내 기재부 예산실에 예산 결정에 대한 권한이 지나치게 집중돼 있다는 비판이 있다. 국민 경제에서 정부가 예산을 통해 정책을 수행하는 것의 중요성과 파급 효과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비판에 대해 분석과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행정부 내에서 부처들 간의 예산 과정에서 권한 배분 문제는 주로 기재부와 그 외 부처들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이지만,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실과 기재부와의 관계에서도 존재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독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기재부 예산실의 막대한 권력에 대한 비판은 최근 제기된 것이 아니며 매우 오래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예산 편성 권한은 당시 경제기획원에 있었다. 경제기획원은 경제개발을 지휘하는 부서로서 군사 정부하에서 막강한 실권을 쥐고 경제개발을 실무적으로 기획하고 지휘했다. 이러한 권한을 가지며 타 부처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의 중심이 바로 경제기획원이 가진 예산에 대한 권능이었다.

박정희 정권 이후 정부는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기획예산처, 기획재정부 등 예산의 권능을 가진 부처를 중심으로 공공부문의 활동을 이끌어왔다. 이 과정에서 예산실 권한은 묵과하기 힘들 정도의 수준으로 비대해졌다. 국내 공공부문에서 부정적인 측면의 모습은 많은 부분 예산실의 이 비대한 권한과 연계돼 만들어졌다. 기재부 이외의 개별 부처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개별 예산사업들을 기획하고 편성하는 작업에서 밀려나면서 어려움을 겪고 전문성도 점차 잃어버리고 있다.

타 부처와 관계 새로 정립해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재정 거버넌스의 올바른 정립을 위한 핵심과제라고 볼 수 있다. 차기 정부에서는 우선 재정 거버넌스의 틀을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재정 거버넌스의 틀 위에서 재정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재정정책은 향후 한국의 경제상황을 규정짓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정책수단이 될 것이다.

재정 거버넌스 이슈의 핵심은 결국 예산 과정에서 기재부와 타 부처와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돼야 한다는 것이다. 재정 운영에서 기재부 관료들의 독주가 발생하는 것은 정부의 예산 편성권을 기재부가 사실상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부 내부에서 기재부라는 예산 전담부서와 기타 부처 혹은 대통령실의 예산 운영에 대한 시각이나 예산 편성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는 경우 재정 운영 과정을 기재부가 주도하는 것은 국회 입장이나 대통령실, 행정부 전체 의사와도 무관하게 예산안이 결정되는 것을 뜻한다.

재정 운영 프로세스에서 행정부와 입법부의 역할 분담 그리고 행정부 내에서 개별 부처들의 역할 분담의 새로운 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기재부에 부여됐거나 이들이 실제로 행사하고 있는 예산에 대한 권능을 집중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기재부가 행사하고 있는 예산에 대한 권능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하고 예산부서의 조직개편이 필요하다면 그것도 해야 한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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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