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5’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1월 6일(현지시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로봇을 위한 챗GPT의 모멘트가 다가오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월 10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폐막한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5’에서 로봇 개발과 자율주행을 위한 플랫폼 ‘코스모스’ 출시를 예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2022년 등장한 챗GPT가 AI 혁신을 가져온 것처럼 AI와 로봇이 결합한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이하 휴머노이드) 시대가 도래했음을 시사했다.
젠슨 황 CEO는 지난 1월 6일 ‘CES 2025’ 기조연설을 할 때는 협업 기업들이 개발한 휴머노이드와 함께 무대에 올라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는 “물리적(Physical) AI 모델은 개발 비용이 많이 들고 많은 양의 실제 데이터와 테스트가 필요하다”며 “(코스모스는) 개발자에게 이런 데이터를 쉽게 생성할 방법을 제공하고 개발자는 이를 미세 조정해 맞춤형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리적 AI는 로봇과 자율주행차 등 물리적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AI 시스템이다. 코스모스는 이들 시스템이 인간과 같은 수준의 지능을 갖추기 위해 데이터를 학습할 수 있게 지원하는 무료 플랫폼이다.
엔비디아가 AI칩과 함께 엔비디아의 제품 위에서만 구동하는 AI 개발 플랫폼 ‘쿠다(CUDA)’를 만들어 생태계를 구축한 것처럼 코스모스를 업계 표준으로 만들어 물리적 AI 시대를 주도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젠슨 황은 코스모스 출시 이유로 휴머노이드가 AI 시장의 중심이 될 것이란 점을 들었다. 휴머노이드는 기존 문자 기반 AI와 달리 사람의 동작 패턴과 경험 등을 학습해 최적화할 수 있는 특화된 AI 모델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현실과 똑같이 만든 컴퓨터 속 가상 환경에서 휴머노이드를 학습시키고, 이를 산업 현장에 연결해 혁신 속도를 높이겠다는 것이 엔비디아의 구상이다.
엔비디아에 따르면 ‘피겨 AI’ 등 로봇 기업과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 ‘도요타’, 차량 공유 업체 ‘우버’ 등이 코스모스를 채택했다. 현대차그룹도 지난 1월 10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엔비디아와 모빌리티 혁신을 위해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현장에서 ‘CES 2025’를 관람한 김덕진 세종사이버대 컴퓨터·AI 공학과 교수는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행동을 학습하는 현실 세계에서는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고, 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는데 엔비디아가 이런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돕겠다는 것”이라며 “엔비디아의 영향력은 커지겠지만, 코스모스의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통해 로봇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기업들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AI 발달·생산인구 감소 등으로 사회적 필요 대두
그간 AI 업계는 쓸모를 증명해 돈을 벌 수 있는 폼팩터(외형)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답을 휴머노이드에서 찾고 있다. 세계 각국이 고령화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로 몸살을 앓으면서 휴머노이드의 필요성이 커졌다. 휴머노이드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상업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변화무쌍한 환경에 유연히 대처를 못 하고 몇몇 정해진 행동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챗GPT로 AI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휴머노이드의 지능도 높아졌다. 하드웨어 쪽의 핵심 부품인 감속기와 센서, 모터 등의 양산 비용도 크게 내려갔다.
휴머노이드로 이미 돈을 버는 기업도 생겼다. 작년 말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등에 투자를 받았던 로봇 스타트업 피겨 AI가 성과를 내고 있다. 브렛 애드콕 피겨 AI CEO는 지난해 12월 29일 “오늘 피겨가 공식적으로 매출을 창출하는 회사가 됐다”며 “이번 주 휴머노이드를 상업 고객에게 인도했고, 그들은 현재 열심히 작업 중”이라고 밝혔다. 피겨 AI를 구매한 고객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현대차그룹 산하의 미국 로봇 제조사인 보스턴 다이내믹스와 테슬라 출신 엔지니어들이 설립한 피겨 AI는 휴머노이드 기술에서 테슬라의 경쟁자로 평가받는다.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5’ 전시관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유니트리 G1이 관람객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휴머노이드 개발에 가장 앞선 곳은 전기차업체 테슬라다. 테슬라는 올해 안 내부 공장에 휴머노이드 ‘옵티머스’를 1000대 시범 배치하고, 2026년부터는 대량생산을 해 판매(3000만~4000만원)하는 것이 목표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는 지난해 6월 주주총회에서 옵티머스가 회사 시가총액을 현재의 약 44배인 25조달러로 끌어올릴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챗GPT 운영사인 오픈AI도 휴머노이드 개발을 위해 지난 1월 10일 로봇공학 전문가를 구하는 공고를 게시했다.
중국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CES 2025’ 기조연설에 등장한 협력업체들의 휴머노이드 14개 중 6개가 중국 제품이었다. 중국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중국 기업 유니트리가 출시한 휴머노이드 G1의 가격은 2000만원대다.

국내 기업들도 휴머노이드를 미래 먹거리로 점찍고 기술 개발에 나섰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번 CES에서 휴머노이드가 미래 사업 방향이라고 밝혔다.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지난 1월 7일 ‘CES 2025’ 간담회에서 “휴머노이드 계획이 빨라질 것 같다”며 “우리도 휴머노이드까지 같이 간다”고 밝혔다. 그는 “로봇이 AI를 만나면 새로운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며 “아직 시작 단계지만 새로 나온 기술을 유연하게 접목하면 우리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삼성전자가 로봇 분야에 대해 그다지 빠르다고 볼 수는 없지만 우리도 투자해서 기술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며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최근 로봇 스타트업 레인보우로보틱스의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한 데 이어 한 부회장 직속으로 미래로봇추진단을 신설했다. 레인보우로보틱스는 국내 최초로 2족 보행 로봇 ‘휴보’를 개발한 카이스트 휴보 랩 연구진이 2011년 설립한 회사다.
테슬라 옵티머스 내년 실전 배치, 국내 기업도 속도
조주완 LG전자 대표이사 사장도 지난 1월 8일 기자간담회에서 “지금은 로봇 사업을 식음료, 물류 쪽에 집중하고 있지만 ‘가정 영역’에서 쓸 준비를 하고 있다”며 “가사 로봇 등의 콘셉트를 갖고 진행 중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LG전자는 꾸준히 로봇 사업을 위한 투자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3월 AI 기반 자율주행 서비스 로봇 스타트업 베어로보틱스에 약 800억원을 투자해 지분을 취득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휴머노이드 전 단계인 가정용 AI 로봇 볼리·Q9 등을 준비하고 있다.
휴머노이드는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산업이다.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을 넘어 사고하는 지능까지 구현하려면 막대한 투자금이 들어가야 한다. 로봇 업계에서는 국내외 기업들의 투자 속도가 빨라지는 올해가 휴머노이드 산업이 본궤도에 진입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 본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휴머노이드가 운용 환경과 안전 규정이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자율주행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보급될 전망”이라며 “사람이 하기 어렵고, 위험하거나 힘들어 피하는 정형화된 산업 현장부터 먼저 보급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휴머노이드 상용화에 대비해 필요한 법적·사회적·윤리적 제도 마련을 논의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최경진 한국 인공지능 법학회장(가천대 법대 교수)은 “지능형 조력자인 AI 에이전트 서비스가 화두가 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로봇이 결합하면 올해는 휴머노이드가 본격화하는 원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물리 AI 서막을 연 테슬라의 로보택시를 둘러싼 윤리적·법적 위험이 해결되지 못해 서비스가 빠르게 확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지속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 개발을 위해선 사회적 신뢰를 얻기 위한 제도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세계 최대 가전·IT 박람회 ‘CES 2025’에 등장한 미 로봇 기업 리얼보틱스(Realbotix)의 휴머노이드 아리아. 사람의 키와 피부 등 외모를 본떴고 대화도 할 수 있다. 연합뉴스
휴머노이드가 산업 현장에서 확산하면 저숙련 일자리가 감소하고, 이 때문에 노동자의 반발과 사회적 저항에 직면할 수도 있다. 미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1월 8일 ‘미국 일자리를 위협하는 로봇을 둘러싼 싸움’이라는 기사에서 “로봇을 둘러싼 전쟁이 새 행정부 내에서 화약고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 신설된 정부효율부 공동 수장에 낙점된 일론 머스크가 로봇 기술을 지지하는 반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항만 자동화 등에 반대하는 노동자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해 12월 12일 미국 항만 노조인 국제항만노동자협회(ILA) 회장과 만난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항만 자동화로) 절약되는 돈은 그것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초래하는 고통과 상처,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운송·카지노 등 다양한 업종의 노조들이 자동화로 인한 실직 노동자 보상 등을 계약 조건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노사 간 협상에서 임금과 근로 조건 등이 주요 의제였는데 이제는 인간과 로봇의 관계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2025년 휴머노이드 원년, 노사 단협 이슈로 등장
미국 동부항만 노사는 지난 1월 9일 AI 확대에 대응하는 ‘고용 안정 장치’를 도입하는 내용의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합의로 앞으로는 새로운 장비 한 대를 도입할 때마다 노동자 한 명을 더 고용해야 한다. 노조가 AI로부터 일자리를 지켜낸 셈이다.
한국에서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지난 1월 8일 AI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변화하는 노동시장과 근로환경을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AI 노동연구회’를 발족했다. 연구회에서는 AI 활용과 일하는 방식의 변화, 일자리 창출 및 근로자 보호를 위한 법·제도 개선방안 등이 논의될 계획이다. 권기섭 경사노위 위원장은 “기술 발전을 명확히 이해하고 노사정이 힘을 모아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노력이 절실하다”며 “기술과 노동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동환경과 정책을 마련해야 할지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휴머노이드가 정형화된 산업 현장을 넘어 가정에도 보급되기 시작하면 사생활 침해와 개인정보 유출, 안전사고 등 다양한 법적 책임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유럽연합(EU)은 개인 정보를 보호하는 일반정보보호규정(GDPR)에 AI와 휴머노이드를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소속 AI 안전연구소 초대 소장인 김명주 서울여대 교수(정보보호학부)는 “휴머노이드로 인해 생길 문제들은 AI가 야기하는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세계 각국의 사례를 보면 사적인 공간에 휴머노이드가 들어가면 생각지 못한 사회적·철학적 질문들이 생겨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AI가 일상으로 들어가면서 생길 여러 사회적 문제와 불안, 혼란 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리스크맵(위험지도)을 마련하는 데 휴머노이드와 자율주행의 포함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은성 기자 ke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