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관한 연구로 세 명의 미국 경제학자에게 수여됐다. 이들 연구에서는 한국의 경제성장이 성공 사례로 인용된다. 수상자들의 연구 내용을 보도하는 국내 몇몇 언론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고도성장을 부각했다. 제임스 로빈슨 교수와의 인터뷰에서는 수출 확대 정책이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그 시대적 맥락은 잘라버리는 언론의 보도는 이들의 연구가 경제성장을 대가로 권위주의 정권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독자를 오도할 수 있다.
노벨상 위원회의 발표문을 읽어보면 언론의 편파적 보도 소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올해 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Daron Acemoglu·57), 사이먼 존슨(Simon Johnson·61),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64)은 국가 번영을 위해 사회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법치주의가 미흡하고 국민을 착취하는 제도가 있는 사회는 성장이나 더 나은 변화를 창출하지 못한다. 수상자들의 연구는 그 이유를 밝혔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들 세 학자의 연구 성과 중 제도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착취적 제도와 포용적 제도를 대비했다. 포용적 제도를 수용하는 국가가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에 성공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해 밝혀냈다고 노벨상 위원회는 설명했다. 그런데 노벨상 위원회는 이들 세 학자의 연구를 좁게 파악하고 있다. 기왕 노벨상을 수여할 거라면, 이들의 학문적 성과를 넓게 파악하고 경제학의 지평을 넓혔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든다.
포용적 제도 수용 국가가 경제성장
한국과 중국은 모두 국가 주도의 자원 동원 체제에서 산업화를 통해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은 민주화에 성공했으나, 중국은 오히려 전제정치가 강화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본질적인 차이가 발생했을까. 이 질문은 아제모을루 교수와 로빈슨 교수가 함께 쓴 2022년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일부다. 논문은 경제적 성과와 제도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요소를 제도뿐 아니라 “문화”를 포함해 조망한다. 여기에서 문화는 신념체계나 역사적 조건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내용을 요약하면, 한국은 국가 권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해 민주주의로 이행했지만 중국은 전제정치 체제가 지속하면서 국민이 국가에 종속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 권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가 민주적인 사회이므로, 한국은 국가 권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해 민주주의로 이행했다는 말은 동어반복이 된다. 더욱 본질적인 질문은 어떻게 국가 권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는가이다. 그 답은 누구나 알고 있듯 시민사회의 성장과 참여다. 한국은 경제성장으로 소득과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시민사회의 역량이 강화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도 커지게 됐다. 열망을 현실로 만든 것은 많은 사람의 목숨까지 희생한 민주화 운동이었다. 민주화 운동이 힘을 받은 것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진보적 정치 세력의 노력뿐 아니라 일반 시민의 참여와 호응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중국 사람들에게는 없는 내용이다. 미국인 교수들의 논문에는 이런 자세한 맥락이 빠져 있다.
국가의 경제적 흥망을 서구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당면하는 난점은 전제정치 체제에서도 경제성장이, 상당히 빠르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이 단적인 사례다. 이 문제의 다른 모습은 민주적 정치체제가 반드시 경제성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아시아국가의 경제성장은 권위주의 체제에서 이룬 성과다. 인과관계를 따진다면, 경제성장으로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시민들이 교육을 더 많이 받는다. 이에 따라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화되고 민주주의는 진전된다. 그 반대 방향은 서구의 일부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다.
이른바 근대화론은 서구 역사를 세계사적 경로로 일반화하고, 그 역사의 경로를 단선적으로 본다. 근대화론에서는 20세기 후반 공산권의 붕괴를 곧바로 서구의 승리로 보고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다. 그러나 세계 역사는 그렇게 단선적이지 않다. 러시아는 여전히 건재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벌이고, 북한은 그곳에 병사를 파견했다. 역사는 진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퇴행하기도 한다.
몇 가지 논점을 짚어보자. “근대적 경제성장”은 인류 역사에서 보면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근대적 경제성장이란 자본의 축적과 노동 능력의 향상, 기술발전으로 성장이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원시적 자본 축적은 인류 역사 어디에서나 있었으나, 근대적 자본축적은 서구의 자본주의가 배태된 시점에서 비롯됐다. 서구를 기준으로 하면 멀리 잡아서 과학혁명이 일어난 16세기 정도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축적은 미약했고, 혁신은 부재했다. 18세기 후반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하면서 기술혁신이 경제성장을 추동하는 근대적 경제성장이 촉발됐다.
고도성장 횃불 서남아시아로 이동
서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근대적 자본주의의 시작점은 매우 늦다. 서구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시대로 이행하면서 그 과실은 본국의 자본 축적에는 이바지했지만, 수탈당한 식민지는 그 기회를 상실했다. 서구 열강 이외에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근대적 경제성장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시기는 대략 19세기 중반이다.
서구 이외 지역에서 경제성장에 가장 성공한 지역은 아시아다. 일본을 선두로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과 중국이 차례로 고도성장을 실현했다. 이제 횃불은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서남아시아로 전달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의 경제성장은 좁게 보면 근대적 경제성장 경로를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맥락을 제도와 문화로 확장해 보면, 서구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유교 문화권이거나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이어서 개인주의적 서구 문화와는 여전히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은 분명 산업화에 이어 민주화에도 성공했다.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한국은 현대 세계사에서는 드물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산업화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서 시작됐고, 민주화는 권위주의에 저항하면서 실현됐다. 혁신은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힘이고, 저항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힘이다. 현대 한국의 진정한 모습은 혁신과 저항을 둘 다 놓지 않았다는 데 있다.
<서중해 경제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