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득과 자산 상위 0.1%나 0.01%에 속하는 계층에게 부와 소득이 지나치게 집중된 세계에 살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여기에 더해 0.1%의 사람, 1000명 중의 1명에게 도움이 되고 나머지 999명에게 해로운 세제개편을 진행하고 있다. 1명의 이익을 위해 999명이 희생당하는 체계가 정치적으로 가능하고, 그런 효과를 가지는 세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것과 같다.
현재 절실하게 필요한 조세재정정책은 한국의 소득 및 자산 상위 0.1%의 자산 축적 경로를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세제개편과 재정정책일 것이다. 이러한 정책의 장기적 실천을 통해 양극화가 초래하는 불평등과 저성장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 그러려면 조세제도의 전면적인 개편과 함께 적극적인 재정정책이 필요하다.
자산·소득 상위계층에 구멍 뚫린 조세제도
우선 조세제도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소득세가 바로잡혀야 한다. 한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45%로 추가되는 지방세 부담까지 고려하면 50%에 달한다. 세율 수준으로서는 부족하지 않다. 다만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과세표준 구간이 매우 높게 설정돼 있고, 금융소득 등 자산소득에 대한 취약한 과세가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법인세의 문제는 3000억원 이상이란 매우 높은 과세표준 구간에 대해서만 24%의 세율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또 국가전략산업에 대한 매우 높은 수준의 투자세액공제와 연구개발(R&D) 세액공제 등으로 기업이 실제로 부담하는 세율 수준도 매우 낮다. 기업에 대한 이런 혜택은 낮은 배당 성향의 한국적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기업의 대주주들에게 귀속된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까지 가업상속공제라는 명분으로 상속세를 약화시켜 왔는데, 여기에 더해 자녀 공제를 대폭 늘리고자 한다. 민주당은 배우자 공제를 크게 늘리겠다고 한다. 상속세 형태가 유산세 제도인 이상 어떤 명분이든 상속세 부담을 줄이기만 할 뿐이다. 상속세 납부 후에 남은 자산이 배우자의 몫이 되거나 자녀의 몫이 되는 것은 그들이 정하는 것이다. 상속세는 대를 이어가는 양극화 문제를 완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세제도인데, 이를 약화한다면 양극화가 대폭 강화되는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한국에는 조세제도에 자산 및 소득 상위계층들을 위한 특별한 구멍들이 있다. 우선 국외 전출자에 대한 출국세 제도를 들 수 있다. 출국세는 대주주인 거주자가 해외 이주 등의 사유로 출국하는 경우 출국 당시 소유하고 있는 국내 주식 등의 평가 이익을 양도소득으로 보아 양도소득세를 매기는 것으로 2018년부터 적용되고 있다.
내국인이 외교부에 해외 이주 신고를 하는 경우 납세증명서를 외교부에 제출해야 하는데, 국외 전출자의 요건은 출국일 전 10년 중 5년 이상 국내에 주소 또는 거소를 둘 것, 출국일 직전 연도 소유주식 등의 비율·시가총액 등을 고려해 대주주에 해당할 것 등이다. 대주주는 상장·비상장·코스닥·코넥스 구분 지분율 1~4%, 지분 금액 15억~40억원을 기준으로 한다.
주식양도차익에는 국제적으로는 거주지국 과세원칙이 적용된다. 따라서 해외 이주를 하면 과세권이 다른 나라로 영구히 넘어가기에 당사자가 국내에 거주하는 기간 형성된 양도차익은 해외 이전 시점에 과세를 하겠다는 취지로 국외 전출자에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제도가 생겼다. 반면 부동산양도차익은 부동산 소재지국 과세가 국제적으로 통용돼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한국의 제도는 대주주가 아닌 여러 종류 주식에 분산 투자한 부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데 상속세 문제도 남아 있어서 상당한 과세 공백이 생기고 있다.
더 중요한 이슈는 경제적 실질 원칙(실질과세의 원칙)과 남용 방지 규정이다. 실질과세 원칙은 헌법상 기본이념인 평등의 원칙을 조세 법률관계에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원리다. 조세 부담을 회피할 목적으로 실질과 괴리되는 비합리적인 형식이나 외관을 취하는 경우 그 형식이나 외관에도 불구하고 실질에 따라 담세력이 있는 곳에 과세해 부당한 조세 회피행위를 규제, 과세 형평을 제고해 조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규범이다.
그런데 조세법률주의와의 관계에서 실질과세 원칙의 실현이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 조세법률주의는 법률의 근거 없이는 국가는 조세를 부과·징수할 수 없고, 국민은 조세의 납부를 강요받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실질과세 원칙을 강하게 적용하자는 측은 조세 법규를 다양하게 변화하는 경제생활 관계에 적용해 예측 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세법률주의의 형해화를 막는 불가분적 관계로 판단한다. 즉 실질과세 원칙의 적용을 통해 조세법률주의의 맹점이 보완된다고 본다.
이에 반대하는 측은 과세권의 남용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돼 납세자의 재산권을 침해해 조세법률주의와 충돌할 염려가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의 경우 법원이 후자의 입장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대변해 실질과세 원칙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긴축적 통화·확장적 재정정책 조합 필요
양극화와 민주주의 위기 극복을 위한 재정정책 운영의 측면에서는 경제 운영 체제의 변화가 요망된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나 토마 피케티 같은 학자들의 참여와 노력, 미국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버니 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등의 활약으로 불평등 이슈가 진보학자들이나 시민단체들의 의견을 넘어 공론의 장에서 주목받기도 했다.
코로나19 유행 시절 방역·소득지원을 위한 재정정책의 투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발생으로 통화정책의 한계도 나타났다. 바람직한 거시경제정책의 조합은 인플레이션과 부동산 연착륙을 위해 긴축적 통화정책을 유지하면서 확장적 재정정책을 통해 경기침체에 대응하고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것이며, 소득 및 자산 상위계층을 겨냥한 조세정책으로 필요한 세원을 마련해 재정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경제의 장기적 성장을 위해서는 ‘과업지향의 재정정책(Mission oriented Fiscal Policy)’이 필요하다. 경제 전환과정에서는 국가가 해야 하고 국가만이 할 수 있는 혁신적 역할이 있는데, 이는 큰 규모의 재정지출을 수반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전환을 위해선 정부가 정책 프레임을 결정하고 먼저 인프라에 투자해야 한다. 민간이 감당할 수 없는 전환기 비용을 지원하고 동시에 공정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교육과 주거, 일자리, 디지털화 등의 영역에서 사회적 투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투자는 잠재성장률을 높여주고 장기적인 성장을 견인한다.
<김유찬 포용재정포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