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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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며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의 트랙터를 경찰이 막자 3월 26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며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의 트랙터를 경찰이 막자 3월 26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윤석열의 파면 여부가 조만간 결정될 예정이다. 그가 대통령직에 복귀한다면 예측 불가능한 극단적 정세가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정상화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한국은 ‘정상적’ 상태가 아니었다. 어디에서 정상화를 위한 출발점을 찾아야 하는가?

실천의 출발점

그동안 이 칼럼은 해당 시기에 필요한 여러 주제를 다루어왔지만, 모든 글이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근대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삼아 한국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변화의 방향을 제안하는 것이다. 여기서 근대 민주주의란 단순히 선거나 정당 같은 대의 제도와 기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에서 만들어진 특정한 정치·사회 모델이며, 개인과 집단의 존재 방식, 언어 형식, 지식 체계 등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고유한 방식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서구에서만 실현 가능한 보편적 모델’이라는 역설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비서구 지역에 정상적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근대화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이상,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거부할 방법은 없다.

한국은 실현할 수 없는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는 불가능한 과제를 수행해왔고, 바로 이것이 근대화라 불리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다른 길을 찾겠다면서 ‘우리식 민주주의’나 ‘우리식 근대화’ 따위를 추구하게 되면 북한이나 박정희 체제 같은 괴물이 탄생한다. 근대 민주주의를 보편 모델로 인정하고,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한국 민주주의의 자기 완결성을 강화해 나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물론 이 기획이 실현 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불가능이 곧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정상화이고, 이 과정은 ‘무엇이 정상적 상태인가?’에 대한 동의를 수립하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정상적 상태를 정의하는 기준이 바로 보편 모델로서의 근대 민주주의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이 기준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단 서너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간이어도 좋다. 정당, 사회운동단체, 지역공동체, 노동조합, 대학 내 연구자 그룹 등 어떤 성격의 모임이어도 상관없다. 근대 민주주의 모델이 헤게모니로 작동하는 공적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그곳에서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정상화를 위한 규칙들

그런 공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존중이다. 한국사회의 상당 부분이 이 규칙에서 어긋난다.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성차별에 맞서 싸워야 한다’ 또는 ‘LGBTQ에 대한 공격에 반대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것은 특정 진영의 주장으로 간주될 뿐,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로 고려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류 정당 중에 차별 반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곳이 없고, 거의 모든 온라인 공간이 특정 대상에 대한 조롱과 공격을 허용한다. 그 대상이 여성, 트랜스젠더, 이주민 등으로 달라질 뿐이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직접 선거를 시행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자유와 평등은 아직도 헤게모니적 가치가 되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합리적 언어를 통해 유지된다. 감정의 차원이 개입하지 않는 정치적 토론과 사회적 관계는 없지만, 그것이 소통의 표준 형식으로 기능할 수는 없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감정의 차원이다. 공적 언어를 지배하는 것은 정확하게 정의된 개념이 아니라 감정을 조직하는 이미지, 레토릭, 떠다니는 기표 따위다. 논변으로 구성된 말과 글을 소통의 기본 형식으로 택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감정의 교류와 충돌에 집중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성의 지배 아래 은폐됐던 비이성적 사유의 효과와 역할을 재발견하려는 작업을 수행해왔다. 한국에도 이런 작업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데 한국에 과연 이성의 지배를 받는 공간이 존재하는가? 오히려 반이성과 감정의 운동이 지배적이지 않은가? 그 결과, 맞고 틀림, 옳고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을 구별하는 기준은 한없이 약화했고, 감정적 효과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무 말이나 내뱉어도 되는 상황이 도래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존엄성을 절대적 가치로 보호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여전히 집단의 부분으로 간주된다. 사회운동 영역에서도 직장 내 괴롭힘이나 갑질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활동가를 집단적 운동의 수단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인정하는 곳도 드물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결혼이나 출산 계획을 밝힐 수 있는 공간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한국사회의 권위적 위계 구조는 이러한 경향을 강화한다.

근대 민주주의 모델이 헤게모니로 작동하는 공적 공간이란 자유와 평등이 공식적 가치로 인정되고, 합리적 언어로 소통이 이루어지고, 개인의 침해 불가능한 영역이 존중되고, 권위적 위계 구조가 허용되지 않는 곳이다. 물론 여기에 언급하지 않은 더 많은 규칙이 있다. 사회적 관계가 권리의 언어와 계약으로 규정되고, 모두가 동등한 시민으로서 관계 맺고, 각자는 자율적 존재로 살아갈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등을 추가해야 한다.

방금 나열한 규칙은 특정 이념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좌파든 우파든 누구나 인정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이다. 물론 각자의 이념에 따라 규칙을 해석하고 실현하는 방법은 달라지겠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규칙의 공통 내용이 분명 존재한다. 서구와 한국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구에도 별별 비정상적인 일들이 벌어지지만, 이런 공통 규칙은 (지금의 미국 정도를 제외하면) 오랫동안 헤게모니로 기능해왔다. 당장 대학만 봐도 차별 금지가 법으로 규정되고, 학술 언어로 소통하고,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 존중된다. 정당 중에 이런 헤게모니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극우밖에 없다. 기업은 최대의 이윤을 추구하지만, 노동자의 사적 영역을 부당하게 침범할 수 없다.

이 모든 규칙은 철저히 서구의 발명품이다. 한국에 그런 규칙이 적용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일종의 실험적 시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적 영향력을 가질 수도 있고, 단지 실험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자체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실험을 계속해야만 한다. 이것만이 정상화를 위한 자기 기준을 수립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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