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윤석열은 한국의 트럼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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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5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이준헌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심판 5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이준헌 기자

작년 12월 3일 이후, 모두가 던졌던 질문 중 하나는 ‘도대체 왜?’였다. 윤석열은 무얼 위해 그런 짓을 벌였는가?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한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무속인의 점괘를 믿어서’ 따위의 설명이 농담처럼 떠돌기도 했다. 그동안 밝혀진 전후 상황을 고려하면, 이걸 농담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가설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성폭력을 저질러 군에서 쫓겨난 노상원이 무속인과 어울리다가 국방부 장관의 비선처럼 활동하고, 현직 군인들이 이런 인물과 함께 롯데리아에서 쿠데타를 모의하고, 대통령은 이들에게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를 공격하라고 명령하고, 심지어 무속인이 국회 증인으로 출석하는 광경을 보면서 과연 쿠데타의 이유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비선 실세 최순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는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이번 사태도 이해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남을지 모른다.

윤석열, 트럼프, 전두환

누군가는 윤석열을 ‘한국의 트럼프’라고 부르는데, 이 둘은 전혀 다르다. 트럼프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려는지는 분명하다. 그는 왜 관세 전쟁을 벌이고, 이민자를 추방하는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미국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의 반복이다. 그의 조치가 실제로 미국에 이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민자를 증오하고, 엘리트와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자국의 이익에 절대적 우선성을 부여하려는 집단적 의지에 충실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의지가 단순한 집단 망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구의 극우 집단은 ‘순수한 자기 정체성’, ‘자기 공동체의 배타적 이익’ 따위에 대한 집착에서 태어난다. 이는 서구 문화와 민주주의 자체에 잠재된 위험이다. 극우는 이런 내적 위험을 극단적 형태로 현실화하려 시도한다. 민주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 극우 포퓰리즘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트럼프는 철저히 ‘전략적 합리성’에 따라 움직인다. 이런 합리성의 핵심은 목표와 수단의 합리적 결합에 있다. 외계인이 자국 지도자로 변신해 지구 침공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를 암살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외계인과 싸운다는 목적은 망상이고, 암살이라는 수단도 정당하지 않지만, 이러한 목적과 수단은 충분히 합리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 만일 외계인을 죽이기 위해 무당을 찾아가 굿을 한다면, 그는 ‘기이하게 미친 사람’ 정도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치밀하게 무기를 준비해 실제로 암살을 시도한다면, 그는 전략적 합리성에 따라 움직이는 망상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전쟁, 학살, 쿠데타, 테러 따위가 이런 ‘합리적 망상가’들의 작품이다. 그런 비극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비합리적 목적과 정당하지 않은 폭력이 합리적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그의 주장은 제 나름의 합리적 판단일 수도 있고, 일종의 망상일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음모론, 가짜뉴스, 집단적 증오심, 망상 따위의 비이성적 수단을 적극 활용한다. 하지만 그의 목적과 수단은 매우 합리적으로 조직되고,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향한 실질적이고 강력한 위협이 된다.

이러한 전략적 합리성은 ‘성공한 독재자’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전두환을 보라. 그의 모든 행위에는 분명한 전략적·전술적 목표가 있다. 그는 자신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명확한 전략적 목표에 따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수단을 사용했다.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 중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지만, 우리는 왜 전두환이 학살을 저질렀는지 꽤 분명히 알고 있다.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부터 1987년 6월 29일 선언까지 그가 결정하고 행동한 모든 것에 ‘왜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이에 대한 답은 단순하다.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한없는 적대감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어떤 종류의 악인이었는지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2차 현장조사 청문회가 진행된 지난 2월 5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 인근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2차 현장조사 청문회가 진행된 지난 2월 5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 인근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윤석열의 이해 불가능성

윤석열이라는 인물의 특징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는 일관된 지향이나 목적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 목적이 망상이든 아니든, 타당한 것이든 아니든, 애초에 행위의 지향점 자체가 불분명하다. 그가 부정선거를 실제로 믿고 있는지 아닌지, 망상에 빠진 상태인지 아닌지는 제삼자가 알 수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부정선거를 밝혀내겠다’는 목적과 쿠데타라는 수단 사이에는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연결고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직 군인·현직 무속인에게 쿠데타의 기획을 맡겼던 걸까? 윤석열과 주변 일당은 결코 합리적 망상가로 불릴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기이한 광인에 가깝다. 이 점에서 그들은 다른 극우 정치인과도 분명히 구별된다. 예컨대 이준석은 반페미니즘이라는 망상을 활용하지만, 이 망상은 분명하고 일관적이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이라는 상위 목적을 결코 거스르지 않는다. 그는 나름의 전략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윤석열의 이해 불가능한 행위들을 이해하려면 전혀 다른 논리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는 오로지 감정적 충동과 해소의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야당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 부정선거라는 망상, 독재자에 대한 오랜 선망 같은 감정이 이리저리 뒤얽혀 내란이라는 파괴적 행동으로 귀결된 것은 아닌가? 트럼프가 실질적 효과를 위한 수단으로써 감정적 차원을 활용한다면, 윤석열은 자신이 원하는 감정적 효과를 얻기 위해 실질적 수단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정의 논리가 윤석열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에는 모든 종류의 합리성을 거부한 채, 지속성과 일관성 없는 집단적 감정의 논리에 따라 흘러다니는 충동적 흐름이 있다. 이런 흐름에는 분명한 목적도 없고, 목적과 수단의 연결도 없다. 진실과 거짓, 맞는 소리와 헛소리의 구별도 없다. 망상이든 음모론이든 자신이 원하는 감정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허용된다. 얼마 전 등장한 극우 테러리즘은 이런 흐름의 극단적 형태 중 하나다. 윤석열과 극우 지지자들은 전략적 합리성조차 거부한다는 점에서 파시즘보다는 ‘덜’ 위험할지 모른다(파괴적 집단 감정이 전체주의 국가의 합리적 전략 구조 안에 포획될 때, 파시즘의 진정한 위험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한국의 극우는 아무도 포획할 수 없는 무형의 파괴적 에너지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유형의 위험을 생산한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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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