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은 짧았지만 트라우마는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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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로 본 세상] 계엄은 짧았지만 트라우마는 길었다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난 12월 3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로 향하는 취재 차량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계엄사 포고령 제1호의 마지막 문장은 단호했다. 그리고 귓가에 박힌 두 단어는 곧 마주할 공포를 예고하는 듯했다. ‘계엄’과 ‘처단’!

헬기가 국회 경내에 착륙했다. 그리고 완전무장한 계엄군이 나타났다. 국회 장악이란 목표가 확실해 보이는 그들을 상대로 야당 당직자들의 격렬한 저항이 시작됐다. 경찰에 의해 의원들의 출입도 막힌 상황. 우원식 국회의장은 경찰의 눈을 피해 국회 담을 넘었다. 일촉즉발의 혼란 속에 열린 본회의에서 재석의원 190명 전원 찬성으로 계엄 해제 안건이 가결됐다. 이 모든 일은 본회의 저지를 위해 국회에 진입한 계엄군이 본회의장으로 향하는 동안 이루어졌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모두가 가슴 졸인 순간이었다. 단 5분만 늦었어도 대한민국의 운명이 송두리째 뒤바뀔 수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 1980년 5월 서울대 교정에서 열린 12·12 군사반란 모의재판에서 재판장을 맡아 반란 수괴로 기소된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후 5·18 당시 계엄군을 피해 강원도 강릉의 외가로 피신했다며 전두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던 과거가 있다.

<성동훈 기자 zenis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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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역경루
오늘을 생각한다
용산의 역경루
공손찬은 중국 후한 말 북방민족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화북의 군벌이다. 오늘날 베이징 근처 유주를 근거지로 세력을 키웠던 공손찬은 백마의종이라는 막강한 기병대를 중심으로 황건적과 만리장성 넘어 이민족들을 토벌하며 군세를 넓혀갔다.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갖췄으나 성품이 포악했던 공손찬은 폭정을 일삼으며 민심을 크게 잃는다. 왕찬이 기록한 <한말영웅기(漢末英雄記)>에 의하면 공손찬은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이유로 부하를 죽이는가 하면 유능한 관료들을 쫓아내고 점쟁이를 측근에 등용하는 등 막장 행각을 벌였다. 하루는 백성들 사이에서 덕망 높았던 관리 유우를 저자에 세워놓고 ‘네가 천자가 될 인물이라면 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말한 뒤 비가 내리지 않자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분개한 수만의 유주 백성들은 유우의 아들과 합세해 공손찬을 공격했고, 라이벌 원소와 이민족들까지 연합해 공격하니 공손찬은 고립무원에 처한다. 사방이 포위된 공손찬은 기주 역현에 거대한 요새를 짓고 농성에 들어가니 이 요새가 역경성이다. 자신의 남은 전력을 요새 건설에 쏟아부은 공손찬은 “300만석의 양곡을 다 먹고 나면 천하정세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향락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