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연예면에서 가장 잘 팔리는 콘텐츠가 이른바 “사생활 논란”이다. 이 말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 사생활에 속한다면 공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공적 공간에서 다루어져야 할 사건이라면 애초에 사생활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에 등장한 미묘한 문제 중 하나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관계다. 한국사회는 이 관계를 다룰 정교한 규칙을 수립하는 대신, 오히려 난잡하게 뒤섞으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사생활 논란이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공사의 구별
한국어 공(公)과 사(私)는 주로 서구어 퍼블릭(public)과 프라이빗(private)의 번역어로 사용되지만, 두 개념 쌍의 의미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퍼블릭은 ‘한 공동체의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들의 영역’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박이대승의 소수관점(47) ‘한국에 개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하는가’ 참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정치 체제와 제도,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 누구나 접근 가능한 열린 공간 등이 퍼블릭에 속한다. 프라이빗은 타인과의 관계가 배제된 공간, 개인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공간이다. 흔히 이 공간의 범위를 가족으로 넓히기도 하는데, 가족이란 각자의 프라이빗을 공유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은 개인의 존엄성 자체를 구성하므로, 그것을 침범하는 행위는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한국에서는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한다’는 규칙이 일종의 격언처럼 떠돌아다닌다. 회사 사장이 직원에게 저 규칙을 언급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자. 이때 ‘사’는 프라이빗의 의미겠지만, 회사 업무를 의미하는 ‘공’은 퍼블릭 개념과 상관이 없다. 그의 의도는 ‘개인 생활이 회사 업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라’ 혹은 ‘개인 생활을 어느 정도 희생해서라도 회사 업무에 집중하라’는 것일 테다.
여기에는 중요한 비대칭이 있다. 공과 사의 구별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개인 생활이 노동 시간을 침범할 수 없는 만큼 회사 업무가 사적 시간을 침범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회사 직원이 사장에게 ‘공과 사는 구별돼야 하니, 회사 업무가 내 개인 생활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지는 못한다. 회사는 업무 시간 이후에 회식을 요구하거나 휴일에 메시지를 보내면서 사적 시간을 침범하지만, 공사 구별이 이런 행위를 금지하는 규칙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결국 저 규칙의 명시적 표현과 실제 의미는 정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을 위해서는 공사를 구별하지 않고 사를 희생해야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별개의 사례처럼 보이지만, 연예인의 사생활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미디어 시장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연예인이 공인인지 아닌지는 언어의 정의에 달려 있다. 공인을 ‘국가 기구의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public person)’으로 정의할 경우,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 이 말을 단순히 ‘널리 알려진 인물(public figure)’로 정의한다면, 연예인은 공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직종에 비해 사생활의 많은 부분을 대중에게 노출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공적 매체에 노출할 수 있는 영역과 사적인 것으로 보호받아야 할 영역 사이의 경계가 필요하다. (이런 경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좋은 미디어고, 그러지 않는 것이 나쁜 미디어다. 지각 있는 콘텐츠 소비자와 그렇지 않은 소비자를 구별하는 기준도 여기에 있다.) 주목할 것은 공인을 어떻게 정의하든, 이 말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두 영역의 경계를 지우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공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공과 사가 개념 쌍으로 사용될 때는 대부분 사적인 것을 소비하고 침범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규칙 없는 상태의 지속
한국사회의 권위주의는 오랫동안 사에 대한 공의 우월함을 강요해 왔다. 사적 영역에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공적인 것이다. 그래서 퍼블릭이 아니라 프라이빗에 속하는 회사나 사회 조직도 자신을 공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런 식의 권위주의는 많이 허약해졌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전히 많은 사회 영역과 언어 습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규칙이 등장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요즘에 이른바 MZ세대가 화제인 것은 권위주의적 공사 관계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업무와 사적 영역의 관계가 노동 계약에 따라 엄밀히 규정되고, 업무 범위와 성격을 관리할 정교한 규칙이 존재했다면, 지금과 같은 혼란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약과 합의된 규칙이 아니라 ‘시키면 그냥 한다’는 식의 규칙에 의존한 조직은 예전 같은 통제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업무와 사적 영역의 관계는 무엇보다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노동 계약의 당사자라는 사실에 따라 규정돼야 한다. 중요한 문제는 회식과 야근을 거부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회식과 야근이라는 문제를 계약 관계에 따라 다룰 수 있는지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가 이러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타인과의 협의를 통해 공통의 제도와 규칙을 수립하려는 노력은 갈수록 적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노미 상태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정치인이다. 세상 어디에나 권력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그런데 한국의 부패한 권력자 중에는 기묘한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내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지위를 이용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부패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최근 폭로된 윤석열, 김건희, 명태균 사이의 대화를 보자. 이들은 사적 관계와 사적 관계 아닌 것을 실제로도 전혀 구별하지 못한다. 이는 공과 사에 대한 기존 규칙을 극단적 형태로 내면화한 결과물이다. 즉 ‘나는 국가를 운영하는 공인이고, 공적 활동을 위해 내 사적 영역 전부를 바쳤으므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공적 행위다’라고 믿는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사적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운영과 사적 활동을 일치시킴으로써 국가 제도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지금 많은 사람이 국정농단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