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재선거 3위로 패배 후 ‘정권 조기종식’ 노선 전면화 속내는
전남 영광 불갑사 가는 길, 상사화는 시들었다. 매년 9월에 열리는 상사화 축제는 영광의 대표 축제다. 올해 축제는 망쳤다. 기후변화와 때늦은 폭염 덕분에 축제 기간엔 꽃이 피지 않았다. 지역 신문에서 축제가 끝난 후에야 상사화가 만개했다는 소식을 읽고 발걸음을 옮겼지만 며칠 새 시들어 기대했던 ‘빨간 꽃 바다’는 볼 수 없었다.
10·16 재보궐선거를 앞둔 지난 10월 12일, 영광 불갑사와 곡성 일대를 찾았다. 상사화는 못 보고 한 표를 호소하는 각 당의 선거운동만 만개했다. 과장 않고 거의 100m 간격으로 각 당 자원봉사자들이 5~6명씩 서서 지지를 부탁하고 있었다. 하늘색 점퍼는 진보당, 검은색 점퍼는 조국혁신당이었다. 상대적으로 더불어민주당 선거운동원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전남 영광에서 후보를 못 내고 곡성에서만 후보를 낸 국민의힘은 읍내 선거사무실 주변에서만 빨간 점퍼를 입은 2~3명의 선거운동원을 볼 수 있었다.
호남에서 사그라든 조국혁신당 돌풍?
“우리로선 딱 주말에만 가능했던 일이다.” 황현선 조국혁신당 사무총장의 말이다. “평상시에는 당원들이 하고 싶어도 다 직장을 다니고 생업을 가지신 분들이라… 지역조직이 없는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 선거였다고 본다.” 주말, 기자가 목격한 선거운동원들은 전국 시도당에서 달려온 지원군이었다. 김영석 조국혁신당 전남도당 사무처장은 “멀게는 울산시당·경남도당, 강원도당이나 경기도당·서울 등지에서 지속해서 100여명씩 자원봉사 선거운동을 왔다”고 말했다. 조국혁신당만이 아니다. 진보당도 총집결했다. 선거 전 국회에서 만난 민주당 측 전략 담당 인사는 “대학생 때 농활하듯” 진보당 측에서 전국 당원을 동원했다고 말했다. 칼 갈아주기, 경로당 앞 청소 등 이들의 바닥을 훑는 자원봉사 활동을 두고 당 차원에서 선관위 고발도 한때 검토했다고 한다. 일정 시간 이상의 자원봉사활동을 선거법에서 금지하는 기부행위에 해당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인사는 “결과적으로 노이즈마케팅이 돼 진보당을 더 띄워줄 수도 있기 때문에” 선관위 고발은 검토만 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재선거 성적표만 보면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패자는 조국혁신당이다. 민주당·국민의힘은 각자의 아성 두 곳을 각각 수성했고, 진보당은 영광에서 조국혁신당을 꺾고 2등을 차지했다. 조국혁신당은 당대표가 직접 영광 한달살이에 나서는 등 당력을 총집중했지만 당선자를 내지 못했고, 제4당인 진보당에게도 밀렸다. 지난 4월 총선 때 영광과 곡성에서 조국혁신당이 받은 비례표와 비교해보니 영광에서는 3651표, 곡성에서는 1274표가 빠졌다. 영광만 놓고 보면 지난 총선에서 비례는 민주당과 진보당 등 비례연합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이 1만2234표를 받았고, 조국혁신당은 1만2024표를 받았다. 조국혁신당이 영광 재선거에 기대를 걸었던 이유다.
“중앙정치의 시각에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지역 언론이나 지방 정치권의 평가는 다르다. 3파전이 된 것을 두고 민주당이 사실상 진 선거가 아녔냐는 평가가 나왔다.” 황현선 사무총장의 말이다. 조직이 없는 창당 7개월짜리 신생정당(조국혁신당)이 이만큼 버텨냈다면, 호남에서 경쟁 구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지역 정가에서는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황 사무총장의 말이다. “처음 후보 등록할 때만 하더라도 진보당 선거운동원이 150명, 민주당은 500명을 등록했다. 우리는 고작 30여명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엔 도저히 안 돼 중앙당 당직자들이 서울에 있지만 일단 사람이라도 넣어보자고 해서 등록했다. 피켓이라도 들 사람이 필요한 듯해서. 민주당은 선출직 위주로 전국에서 총동원했고, 진보당도 과거 도의원도 배출하고 농민회도 있는 등 조직 세가 만만치 않은 독특한 선거였다. 둘째로, 진보당 선거운동이 초반에는 민주당 표를 가져갈 것이고, 뒤로 갈수록 우리 표를 가져갈 것으로 예상했다. 왜냐면 조직이 없으니까. 예상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선거에서 ‘졌잘싸’는 없다”
“정신승리다. 세상에 선방한 선거는 없다. 이겼나 졌나만 있을 뿐이다. 조직력이 없음에도 선전했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다. 호남에서 일당 독재의 대안이 되겠다고 나온 건데, 졌으면 대안이 되지 못한 것이다. 호남에서 왜 대안이 되지 못했느냐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장의 말이다. “조국혁신당은 진보당에 왜 밀렸는지 곰곰이 판단해야 한다. 문제의 원인이야 복합적이겠지만 진보당이 치고 올라오면서 판세가 흔들렸던 것은 결과적으로 너희들은 대안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재보궐에만 전국 집중이 가능하니 진보당을 재보궐 특화당이라고만 한다면 전국 단위 선거나 수도권 선거면 이야기가 달라지나. 민주당, 국민의힘 양당 바깥의 사람들에게 조국혁신당이 대안이라는 인식이 퍼져야 하는데 안 퍼진다. 정책대안으로 ‘사회권 선진국’을 주장하지만 정치고관여층 시민들도 거기까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냥 ‘매운맛 민주당’ 정도? 정치 비수기라는 특징이 있지만 이탈한 민주당 지지자 마음을 돌려세울 방법이 있나. 지난 총선은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비례는 조국혁신당)로 성공했지만 지역구 단위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이번 재보궐이었다. 2026년 지방선거나 대선에서는 총선과 같은 전략이 안 통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국혁신당은 비례 정당이다. 지역 정당이 아니라.” <정치내전> 저자인 유창오 시사평론가가 설명하는 지난 총선에서 ‘지민비조’가 통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흔한 착각이 비례 정당은 중도적인 정당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예전 안철수 정당이 실패한 원인이다. 정치학에서 일반적인 이론은 정당투표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더 근본적(radical)이거나 선명한 정당을 찍게 마련이다. 과반이나 다수를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총선에서도 중도나 제3의 길을 이야기했던 정당들은 다 망했다. 민주당보다 오히려 더 혁신적이고 센 것을 이야기했던 조국혁신당이 비례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다. 지역구 선거는 그렇게 작동되지 않는다. 더 선명하거나 센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도 실제의 집권 가능성이나 세를 고려한다.” 조국혁신당이 아무리 비례선거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특히 호남 유권자들로부터 유의미한 지지를 받았더라도 지역구 선거에서는 민주당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게 드러난 결과라는 것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정당들의 역학 구도·세(勢)를 확인할 수 있는 다음 선거는 2026년 6월 지방선거다. 바로 다음 해인 2027년 3월이 대선이다. 유 평론가는 이렇게 덧붙였다. “민주당의 당헌에 따르면 선거 6개월 전에 대선후보를 뽑아야 하는데 그러면 2026년 9월이다. 말하자면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된다. 결국 2026년 지방선거는 현재로선 대선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봐야 한다. 어느 당이 차기 대선에서 유력하냐에 지방선거 결과도 영향받는다는 뜻이다.”
현재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모두 당대표 사법리스크를 안고 있다. 재판 결과에 따라 상황이나 구도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 다른 변수는 없을까. 예컨대 지방선거 전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이나 자진 사임과 같은 유고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유 평론가의 말이다.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것이 2016년 탄핵 당시 김무성과 같은 당시 여권 중진이 탄핵에 동참한 이유다. 반기문이라는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허무하게 끝나버렸지만. 둘째로는 헌재 인적 구성 변화다. 내년 3~4월경 대통령 몫 헌법재판소 재판관 2명이 임명되는데 국회 동의도 필요 없다. 다시 말해 교체되는 2명의 재판관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으로부터 윤석열이 임명한 사람으로 변경된다는 뜻이다. 탄핵이 가능하려면 국회 몫 3인이 임명돼야 하는 이번 10월부터 내년 3~4월까지가 적기라는 뜻인데 만만치 않다.”
창당 후 첫 장외집회 연 조국혁신당
재보궐 후 조국혁신당은 창당 때 내건 양대 구호 ‘윤석열 정권의 조기종식’과 ‘사회권 선진국’ 중 탄핵을 매개로 한 조기종식 쪽으로 집중하는 모양새다. 지난 10월 26일 서울 서초동에서 열린 ‘검찰 해체·윤석열 탄핵 선언대회’는 창당 이후 조국혁신당이 처음으로 연 전국 집중 장외집회다.
서왕진 조국혁신당 의원은 “총선 다음날 조국혁신당 당선인 12명의 첫 일정도 서초동에서 검찰개혁 의지를 밝힌 것”이라며 “조국혁신당의 제1의 존재 이유도 ‘가장 앞장서서 싸우라’라는 국민의 명령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당 정책위 의장인 그는 이번 국감에서 조국혁신당 의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 같다는 평가에 대해서 “국회 구성에서 수적 열세에 기반한 정보력·화력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났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금은 정책의 시간이라기보다 탄핵과 정치의 시간이다. 그 과정에서 비록 원내에서는 소수정당이지만 당이 가진 모든 정보와 역량, 제보를 취합해 내용을 만들어 탄핵의 발화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지금 시기 조국혁신당의 역할이라고 본다.” 10월 26일 서초동 탄핵 선언 집회에 이어 오는 11월 2일부터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시민들을 만나는 ‘탄핵다방’을 만들 계획이다. 황현선 사무총장은 “사회권 선진국과 관련한 조국혁신당의 정책대안은 내년 초 완성을 목표로 작업을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번 재선거 결과만으로 돌풍이 꺼졌다, 또는 영향력이 약화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본다.” 이강윤 정치평론가의 평가다. ‘지민비조’가 먹혔던 지난 4월 총선은 정권심판 바람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고, 이번에는 그런 바람이 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정당이 착근하려면 정책과 사람 두 가지가 필요하다. 조국혁신당은 주로 윤석열에게 ‘칼을 가는’ 명망가가 많이 포진했고, 또 실제로 조국 당대표가 그런 사람들로 팀을 짰다. 다시 말해 ‘반윤 대오’ 맨 앞의 ‘총알 탄두’ 같은 정당만으로 얼마나 지속가능성이 있느냐의 문제다. 사실상 지금까지는 당원이라는 기반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의 하부구조, 당원을 얼마나 늘려가는가가 조국혁신당에게는 더 중요하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반윤’은 정책이 아니다. 슬로건 또는 주요정체성이지만 그것만으론 정당이 기능할 수 없다. 정당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하부구조를 이루는 당원과 정치적 목적을 실질적인 지점에서 구체화하는 정책이 중요한데 신생 정당에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도 당원도 늘어나고 정책도 두터워진다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이후 당의 내실을 얼마나 기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가늠할 척도라는 지적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