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쓰지 않지만 버리지도 못하는 것을 담아둔 상자가 있다. 상자를 가득 채운 것은 전자기기를 구매할 때 따라온 충전 케이블들이다. 케이블이 많아도 용도별로 단자 모양이 제각각이라 결국 새로운 케이블을 집에 들이게 된다.
![[오늘을 생각한다]우리도 충전단자 통일법을](https://img.khan.co.kr/newsmaker/1433/1433_82.jpg)
전자기기들의 충전단자가 동일한 모양이면 어떨까. 충전단자가 통일되면 고객은 훨씬 더 편리할 뿐 아니라 돈도 아낄 수 있다. 불필요한 물건들의 생산 또한 줄일 수 있다.
반갑게도, 신형 아이폰부터 C타입 단자가 도입된다고 한다. 호환이 불가능한 독자적인 단자를 오랫동안 고집해오던 아이폰이 어쩌다 C타입 단자로 전환하게 됐을까. 그 배경에는 2022년 6월 유럽연합을 통과한 일명 ‘충전단자 통일법’이 있다.
유럽연합은 2024년 말까지 중소형 휴대용 전자기기의 충전단자 표준을 통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충전단자를 통일해 연간 1만1000t에 달하는 전자기기 관련 폐기물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소비자들이 연간 2억5000만유로를 절감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애플은 충전단자 통일법이 혁신을 위축한다며 반대해왔다. 이 기업은 그동안 독자적 단자의 라이선스 비용으로 연간 수천만달러의 매출을 획득해왔다. 통일된 단자로 전환할 경우 이러한 매출을 잃는데 더해 새로운 공급망 구축 비용, 고객 유출 등 다양한 리스크가 부담이 된다. 하지만 해당 법의 시행이 눈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애플 또한 이에 맞춰 전환을 준비 중이다. 유럽연합이 쌓아올린 작은 공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충전단자 통일법은 유럽연합이 순환경제 이행을 위해 수립해 시행 중인 수많은 이행계획의 일환이다.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것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궁극적인 방안이므로, 제품을 오래 사용하고, 덜 생산하며 순환이 용이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유럽연합이 순환경제 정책을 강화하며 내놓은 보고서에서 밝힌 취지는 사뭇 비장하다.
“우리의 생산 및 소비 패턴을 다루지 않고는 유럽연합의 기후 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
이처럼 기업들의 제품 관행이 법에 의해 변화를 맞이하는 일들을 접하다 보면, 내 주변을 다시금 돌이켜보게 된다. 구매한 지 2년도 안 된 휴대전화 배터리는 왜 이렇게 금방 닳는 건지, 부품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고 버린 청소기는 그렇게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이러한 의문이 제품 관행을 변화시키는 토대가 된다. 불필요한 온실가스 배출을 부담스러워하는 소비자가 더 많아져야 한다. 더 오래 가는 제품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확산해야 제품을 설계하고 생산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