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2014년 12월이었다. 아침 ‘알바’를 마치고 집에 갔다가, 해진 후 무대 소품들을 챙겨 다시 집을 나섰다. 몸과 마음의 80%를 이미 새벽 생계에 소모한 후였다. 겨우 남은 20%는 밥 먹고 화장실 들락날락하는 데 써야 마땅했으나, 전생의 업보와 같은 공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을 생각한다]2022년까지 이럴 줄 알았으면](https://img.khan.co.kr/newsmaker/1454/1454_82.jpg)
퀴어활동가들이 서울시청 로비에서 며칠째 점거 농성을 하고 있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만들기 위한 공청회에서 (퀴어를) 혐오하는 세력이 활동가들을 폭행하고, 서울시장은 때맞춰 “(나도) 동성애 싫다”고 말하는 등 시대적 어둠의 장막이 짙게 드리우던 시절이었다. 어느덧 익숙해져 버렸지만, 매일 아침 가슴을 후벼파는 혐오 소식이 들려오던 하루하루였다. 성소수자들과 주변 끄나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시청으로 가서 몸을 바치거나 후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다.
공연을 생각하면 스멀스멀 조여오는 압박감 때문에 힘이 들었다. 지난한 세월의 경험으로 농성장에서의 공연이 얼마나 ‘징한’ 것인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공연 요청을 받지 않을까, 에두를 방법은 없을까 머리를 굴렸다.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세상에 ‘이반지하’는 오직 한사람뿐이었다. 공연할 곡을 귀에 꽂고 택시에 올랐다. “시청 근무 시간도 끝났는데 (시청엔) 왜 가냐”고 자꾸 묻는 택시기사 때문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시청에 도착했다. 로비 유리문을 등지고 무대가 있었다. 빠지면 섭섭할 ‘(퀴어) 혐오’ 친구 대여섯명도 한뼘 정도 옆에서 마이크와 앰프로 찬송가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날도 시청 1층 화장실을 분장실로 사용했다. 변기 위에 앉아 분장을 하고 있자니 한숨이 하얗게 올라왔다. 화장실이고 무대고 형광등 불빛이 어디 하나 그늘지지 않도록 천장을 빼곡히 수놓고 있었지만 유독 성소수자들의 얼굴에는 강한 음영만 드리우는 것 같았다. 각종 운동권 친구들이 발언을 이어가는 동안 구석 테이블 뒤에 몸을 숨긴 채 기다렸다. 뼈를 관통하는 추위를 ‘으드드드’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찬송가를 들으며 공연 중에도 몇 번이나 울컥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큰 환호 속에 공연을 마무리했다.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취한 듯 얼큰한 느낌마저 들었다. 정말 이런 기분이라면 차별금지법 제정까지도 그리 멀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집에 오자마자 드러누워 며칠을 앓았다. 감기몸살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22년 1월이 됐다. 당시 서울 시장은 모두가 알다시피 성으로 폭력해서 그렇게 됐고, 그 자리에 있던 성소수들은 같은 말을 매년 외치며 고대로 나이만 먹었다고 한다. 가끔 그날의 공연을 생각한다. 2022년이 되도록 차별금지법 논란이 이어질 줄 알았다면 그때 그 공연을 하겠다고 그리 악착같이 굴지는 않았으리라. 요즘 돌아가는 거 보니 2050년쯤은 돼야 ‘차별 금지를 할까 말까 법’ 정도 겨우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반지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