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의 통화 녹음파일을 보도했다. 소문만큼 대단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김씨의 권력과 민주주의, 성범죄에 관한 인식은 위험천만해 보였다. 방송이 끝나자 한쪽에서는 “MBC가 나라를 구했다”며 환호했고, 한쪽에서는 “최순실이 시즌2로 돌아왔다”며 언성을 높였다. 김건희라는 사람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그걸 얼마나 알아야 할지에 관해 판단도 없다. 다만 이 녹취록 보도를 통해 아주 흥미로운 것들을 알게 됐다.
![[오늘을 생각한다]김건희 녹취록이 말해주는 것](https://img.khan.co.kr/newsmaker/1404/1404_82.jpg)
녹취록은 김건희라는 사람보다 그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의 더 많은 진실을 드러냈다. 덕분에 몇십분짜리 따분한 녹취록을 듣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의 내면에 관해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가진 사법윤리, 성범죄의 시각, 민주주의와 정치권력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어떠한지 줄줄 읊어댔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가 동시다발적으로 내면의 음습한 생각들을 고백하는 광경은 보기 드물다. 녹취록을 듣고 떠들어대는 말들은 사실 각자에 관한 투명한 진실일 것이다.
이 신묘한 녹취록은 어떤 사람들이 구태여 말하지 않은 것까지 드러냈다. MBC가 한 유튜버의 비윤리적인 녹취파일을 그대로 내보내겠다 예고했을 때 더불어민주당은 공영방송의 노골적인 선거개입에 어떠한 우려도 제기하지 않았다. 이 침묵을 통해 언론개혁 법안 날치기 협박까지 서슴지 않던 이 당의 언론관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이들의 언론개혁이란 보도내용에 따라 언론개혁을 주장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랜덤성 개혁 놀음을 신뢰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씨는 녹취록에서 “언론이 어느 한 편의 팡파르가 돼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구의 개혁대상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다.
대통령 배우자에게 어떤 수준의 도덕을 요구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분명한 건 녹취록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를 지탱하던 규범이 어디까지 무너졌는지 확인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안 줘서 미투가 터졌다”는 김씨의 말에 박수를 치며 범죄자를 두둔했고, 어떤 사람은 “내가 정권 잡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농담을 ‘걸크러시’로 받아들였다. 반대쪽도 우습긴 매한가지다. 방송 전 MBC 게시판을 찾아가 응원메시지를 도배했던 사람들은 방송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방송 후에는 “MBC가 침몰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들의 머릿속에 대법원 판결과 보도윤리, 민주적 기본질서에 관한 합의 같은 것은 잔해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희미하게나마 우리가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가치는 어디로 다 사라진 걸까.
결국 김건희를 수용하고 말고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이 속한 진영이다. 동물의 왕국에는 대본이 필요 없다. 그들은 특별한 신념이 있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속해 있으니까 싸운다. 김건희 녹취록은 이 아수라장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말해준다. 품위 있는 인생을 살려면 그런 고약한 무리에는 속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정주식 직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