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돌아왔다. 지난 1월 정치 비평은 일절 하지 않겠다 했던 유시민이 최근 활동을 재개했다. 유시민은 늘 재기발랄한 논리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중 가장 기발했던 것은 진보정당의 득표를 “죽은 표”라고 주장했던 이른바 사표론이다. 사표(死票)의 사전적 의미는 ‘낙선자에게 간 표’이다. 투표율 100% 득표율 100%가 나오는 북한식 투표가 아니라면 모든 투표에는 사표가 발생한다. 유시민은 사표의 의미를 교묘하게 바꿔치기해 자신의 정파를 위해 활용해왔다.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유시민은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며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게 갈 표는 이회창 당선시키는 표”라며 자당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2004년 총선에서는 “민노당에 던지는 표는 2곳을 빼고 모두 사표”라고 했다. 소수정당에 간 표=사표라는 등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표론은 한국의 허약한 선거제도와 결합해 선거 때마다 맹위를 떨쳐왔다. 지난해 총선에서 민주당 정일영 후보 지지자들은 ‘#이정미 찍으면 민경욱 된다’는 해시태그를 소셜미디어에 조직적으로 공유했다. “권영길 찍으면 이회창 된다” 했던 유시민 발언의 오마주다. 자기 당 후보 이름은 한글자도 쓰지 않고 상대 후보 2명의 이름만으로 네거티브 슬로건을 완성했다. 결국 낙선한 이정미 정의당 후보는 사표론으로부터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이렇게 사표론은 자당 후보의 경쟁력을 보여주기보다는 자기보다 약한 세력을 짓눌러 반사이익을 보려는 얄팍한 전략으로 활용된다. 사표방지심리를 활용한 진보 표심 흔들기는 민주당의 선거운동 매뉴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진보정당들은 선거 때마다 소신투표 캠페인을 펼쳐야 했다. 투표란 원래 소신으로 하는 것이다. 소신투표라는 말 자체가 억압적인 선거 분위기를 말해준다. 이런 비민주적인 선거문화가 조성된 데에는 유시민의 사표론이 큰 역할을 했다.
유시민은 자기 당을 찍지 않는 표가 사표라 했지만, 진짜 사표란 죽은 정치를 지탱하는 표가 아닐까. 2021년 대한민국에서 죽은 정치는 무엇인가? 촛불정권의 초라한 말년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은 양당체제의 시효가 다했다는 것이다. ‘비호감 올림픽’이란 별칭이 붙은 대통령선거. 양당 후보의 비호감도가 호감도를 훌쩍 넘어선 이번 대선은 역사상 가장 격렬한 상호 응징투표가 전망된다. 이미 사라진 두 당의 변별력과 누가 돼도 다를 것 없다는 냉소와 무기력. 누구도 두 당의 정권교대식에 희망을 품지 않는다. 이런 정치환경에서 사표란 무엇을 뜻하는가?
오늘날 시급히 치워내야 할 죽은 정치는 민주당-국민의힘의 독과점 체제이며, 양당을 향하는 표야말로 죽은 정치를 지탱하는 사표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정치의 공간은 관성적으로 양당을 향했던 ‘사표’들을 수거하는 일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많은 유권자가 사표방지라는 오랜 인질극에서 벗어나 담대한 투표를 해주길 바란다.
<정주식 직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