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부고가 전해진 날 어떤 언론은 사망으로, 어떤 언론은 별세로, 어떤 언론은 서거로 표기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추모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조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장은 허용됐지만, 국립묘지 안장은 거부됐습니다. 전직 대통령, 노씨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여도지죄(餘桃之罪).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인 죄라는 뜻입니다. 임금이 총애할 때는 먹다 남은 복숭아를 주는 것도 이쁘지만, 마음이 변하면 죄가 되더라는 뜻인데요, 같은 행동도 상대방의 마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노태우 정부의 정책이 딱 그렇습니다. 노씨는 생전에 ‘물태우’로 불렸을 정도로 박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게 없었던 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부동산정책이 있습니다.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 등 이른바 토지공개념 3법은 헌법 제122조(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에 관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의 취지를 십분 살린 법이었습니다. 과도하게 사유재산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잇달아 위헌,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았을 정도로 파격적이었습니다. 임대차법을 개정해 주택 임대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확대했고, 공시지가 현실화도 추진했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비핵화 공동선언은 더 파격적입니다. 반공이라는 국시를 이어받은 군사정권이 평화통일을 목표로 ‘북괴’와 대화에 나선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습니다. 적성국가로 생각했던 소련, 중공과의 외교수립은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률이 가장 높았던 것도 노태우 정부였습니다. 5년간 최저임금은 시간당 462원에서 1005원으로 2배 이상 올랐습니다.
부동산정책, 대북정책, 분배정책은 여권이 준비 중인 대선공약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역대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만든 정부(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제6공화국이 저평가를 받는 것은 결국 본인 탓입니다. 아들 노재헌씨에게 맡길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12·12 군사쿠데타와 광주학살 가담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의 정책도 달리 보였겠지요.
구두쇠 스크루지는 꿈속에서 자신의 사후를 본 뒤 개심하게 됩니다. 노씨의 사후를 지켜보는 전두환씨의 지금 심정이 궁금해집니다. 최소한의 사죄마저 하지 않은 전씨에 대한 평가는 더욱 냉혹할 텐데 말입니다. 전씨는 경제만큼은 잘했다고 말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국민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성과마저 인정받기 힘듭니다. 사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박병률 편집장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