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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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 지하철 개찰구에서 빠져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데 누군가 슬쩍 끼어듭니다. 흠칫 놀라 쳐다보니 어르신입니다. 걸음걸이가 편치 않아 보였습니다. 몸이 너무 바짝 붙는 것 같아 에스컬레이터 옆 계단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적지 않은 계단이라 살짝 숨이 찹니다. 그러고 보니 습관처럼 에스컬레이터를 탔던 것 같습니다. 걸어 올라온 게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집실에서]계단을 오르며

눈이 많이 오던 어느 해 겨울, 어머니와 함께 한라산을 등반한 적이 있습니다. 9시간쯤 걸려 초주검이 된 30대 아들에게 “젊은 놈이 잘한다”며 핀잔을 주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칠순을 넘어서더니 계단도 무서워하십니다. “행여나 넘어져 어디라도 부러지면 너희가 고생할까봐 그런다”고 둘러대시지만 아들로서 마음 한구석이 먹먹합니다.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 생각해 보면 큰 행복이지요. 아직 건강하다는 뜻이니까요. 발을 디디며 한계단 몸을 끌어올리는 행위는 몸의 많은 기관이 유기적으로 작동한 결과입니다. 발바닥뼈와 근육, 발목관절, 아킬레스건, 햄스트링, 무릎관절, 척추 그리고 몸의 평행을 유지하는 달팽이관까지 어림잡아도 수십개 근육과 뼈, 신경이 동원됩니다. 영국 팝아티스트인 줄리안 오피는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에게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 벽면에 그의 작품이 투사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바로 그겁니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일부에서는 종합부동산세가 급등하면서 양쪽으로 나뉜 여론이 살벌합니다. 공매도 부활과 기관의 주식매도를 놓고도 투자자들은 날이 서 있습니다. 선거철을 맞은 정치권에는 중상모략과 음모론이 판을 칩니다. 2021년 대한민국은 흡사 종착지 없이 달려가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습니다. 다들 기를 쓰고 아득바득 살아갑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도 건강할 때의 얘기입니다. 내 몸이 아프면 땅이고 시장직이고 다 부질없을지 모릅니다. 국민마라토너 이봉주 선수가 원인 모를 병으로 투병 중이라고 합니다. 지팡이 없이는 걷기 힘들어진 그의 소원은 “제대로 뛰어봤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숙연해집니다.

나는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까, 문득 생각해 봅니다. 그리 머지않은 시간에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이 부러워지는 때가 올 것 같습니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과 40을 지나 50을 향해갑니다. 남은 시간은 더 빨리 흐르겠지요.

당분간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멀리할까 합니다. 걸을 수 있을 때 더 걸어보려고요. 봄입니다. 때마침 걷기도 좋은 계절이네요. 돈, 권력, 시기, 질투, 혐오 잠시 잊고 따사로운 봄볕 한번 느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봉달이’ 이봉주 선수도 오뚝이처럼 일어섰으면 좋겠습니다.

<박병률 편집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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