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애와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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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인간애와 용기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42’란 숫자는 매우 특별합니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로, 갖은 수모와 냉대를 딛고 인종차별의 장벽을 허문 재키 로빈슨(브루클린 다저스)의 등번호이기 때문입니다. 42번은 1997년에 메이저리그 30개 전 구단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로빈슨이 빅리거로 데뷔한 날인 매년 4월 15일(1947년)에 모든 선수가 42번을 단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섭니다. 그는 6차례나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뽑혔고, 신인왕과 내셔널리그 MVP(1949년)를 수상하는 등 실력면에서도 정상급이었습니다.

로빈슨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까지 겪은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관중의 야유와 욕설을 기본이고, 상대 선수의 거친 플레이, 심판의 편파 판정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타석에 서면 투수의 공이 머리 쪽으로 날아오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랄 만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1947년 5월 14일 다저스는 신시내티 레즈와 원정경기를 치릅니다. 경기가 열리기 전부터 다저스 구단과 재키 로빈슨에게 “그라운드에 나타나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편지가 수없이 날아듭니다. 경기 당일 로빈슨이 필드에 모습을 드러내자 예상대로 욕설이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소란스러운 와중에 갑자기 다저스의 한 백인 선수가 로빈슨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그는 팀 동료인 유격수 피 위 리즈. 경기장은 일순 정적에 휩싸입니다. 그 사건은 그때까지 백인 일색이던 메이저리그에서 당당한 선수이자 진정한 동료로서 로빈슨을 인정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됐습니다. 2013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42>의 포스터에는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리즈와 로빈슨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로빈슨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지난주에 마주한 한 장의 사진 때문입니다. 지난 6월 14일 영국 런던에서 개인 트레이너로 일하는 흑인 패트릭 허치슨은 부상을 입은 한 백인 남성을 들쳐메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사진을 올려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그는 전날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 도중 극우주의자로 보이는 한 백인 남성이 머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지자 그를 메고 경찰이 있는 곳까지 안전하게 옮겼습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구한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허치슨이 백인 남성을 어깨에 들쳐멨을 때 사람들은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바로 인간애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과 편견을 뚫고 올바르다고 믿는 신념을 관철하는 용기를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인종차별 문제 논란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허치슨이 보여준 행동은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줬습니다. 리즈가 어깨동무를 하는 순간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선수로 인정받은 것처럼, 어쩌면 허치슨이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다친 사람을 구했을 때 이미 인종차별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조홍민 에디터 겸 편집장 dury12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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