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교의 눈

홍콩과 영덕의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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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도시에 가면 나도 모르게 외진 골목을 걷곤 한다. 지난 1월 홍콩에 갔을 땐 오래된 서점들을 찾아다녔고, 그늘진 육교 아래선 몇 번이고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목격했다. 모두 여성이었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홍콩의 반중 시위가 시작된 지 4개월이 지났다. 그간 1400여명의 시민이 연행됐고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 언론은 2019년 홍콩과 1987년 한국의 유사성을 찾으려 애쓰고 있지만 이 사태를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이원론적 구도로만 보면 무언가 놓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쉽게 놓친 풍경 속에 홍콩과 한국을 잇는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홍명교의 눈]홍콩과 영덕의 디아스포라

이를테면 39만명에 달하는 이주 가사노동자들의 존재는 홍콩이 처한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들 대부분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왔다. 홍콩의 이주 가사노동자 지원단체 ‘엔리치’ 보고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의 경제 공헌도는 126억 달러(약 14조원)로, 홍콩특구 총생산의 3.6%를 차지한다. 홍콩의 25~54세 여성들은 가사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을 경우 49%만이 경제활동이 가능하다고 밝혔지만 고용했을 땐 78%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주 가사노동자는 평일엔 고용주의 집에서 일하며 생활하지만 주말엔 고용주 가족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밖으로 나가야 한다. 거주할 곳 없는 노동자들이 늦은 밤까지 거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학대와 욕설, 성폭력, 임금 체불, 하루 13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은 이들의 일상이다. 한 달에 4410홍콩달러(약 67만원)를 받지만 높은 물가를 고려하면 턱없이 적은 돈이다.

홍콩 시위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여론은 압도적 지지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유롭게 시위에 참여할 수 없다. 산더미처럼 쌓인 가사노동, 홍콩 시민사회의 무관심이 그들을 가로막는다. 취업비자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소셜미디어(SNS)를 통한 가짜뉴스와 협박도 방해 요소다.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얼마 전 경북 영덕의 한 오징어가공업체에서 4명의 이주노동자가 질식해 목숨을 잃었다. 국내엔 100만명이 넘는 이주노동자가 있지만 이들에겐 노동권이 보장돼 있지 않다.

국경을 넘나드는 노동의 이동은 자본에 의한 글로벌한 착취가 낳은 그림자다. 식민통치기 부유한 영국인들은 중국인 여성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이후 홍콩이 겪은 불완전한 탈식민지화는 식민시절의 모순을 남겨뒀다. 이주여성과 오징어 창고에서 목숨을 잃은 태국·베트남 노동자들은 세계 자본주의가 낳은 돌봄노동의 국제분업, 저임금 단순노동 분업의 참혹한 결과일 따름이다. 바로 그 점에서 홍콩과 한국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각 사회에 밴 뿌리 깊은 모순에 도전하려면 민족의 자부심 같은 허상이 아니라 외양은 달라도 마찬가지로 억압받고 있는 이들 간의 연대를 통해야만 한다. 홍콩 시민사회가 이주민들과 함께 싸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면 이 운동은 홍콩과 중국대륙의 3억 농민공, 동아시아 전체에 대안을 보여줄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도 주어진 과제다.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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