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 시대의 농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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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찬의 눈]‘석기’ 시대의 농담들

1. 설국열차 새로운 빙하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설국열차>는 8월의 폭염 속을 뜨겁게 달렸다. 900만 명이 탑승했다. 그리고 8월 28일. 대한민국은 국정원이 운전하는 기이한 ‘설국열차’에 올라탔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불러일으킨 트위터-블로그 버즈량은 8월 28일부터 9월 4일까지 일주일간 무려 85만건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먼저 북한식 말투로 가득한 녹취록의 생경한 언어에 놀랐다. 압력밥솥 폭탄이나 장난감총 등의 얘기는 초현실적으로 받아들였다. ‘충격’ ‘경악’ ‘시대착오적’ 같은 단어가 심리 연관어로 포착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정원의 수사방식과 발표시기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유신’ ‘마녀사냥’ ‘부정선거’ 같은 관련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항일시기와 유신시대가 교묘하게 짬뽕된 국정원발 정치 열차는 그렇게 과거를 향해 과속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 연관어 순위는 1위부터 박근혜, 이정희, 문재인, 노무현, 김재연, 박정희, 김한길, 김대중, 남재준, 김일성, 김정일 등이다. 과거의 남북 정상들이 다시 살아나 2013년 가을 입구의 정치를 대신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과거로 갔다.

2. 농담 거기에 ‘정치’는 없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존재감 자체가 없었고 민주당은 무기력과 두려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당사자인 통진당의 이정희 대표는 이 모두를 ‘농담’으로 환원하는 놀라운 변신을 보여줬다. 사실 자체를 부인하다가 조작됐다고 주장하다가 ‘농담’이라는 한 마디로 사건을 희화화하려 했다.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장본인의 말 치고는 지나치게 무책임해서 정말 농담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들 사전에 반성과 사과는 없었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 폐쇄적으로 정착해버린 그 집단이 왜 여태 진보란 이름으로 불려왔단 말인가.

3. 진보의 재구성 9월 4일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이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됐다. 여당은 밀어붙였고 야당은 서둘러 선을 그었다. 그런데도 새누리당 일부와 보수 언론은 아직 배가 고픈 듯하다. 이탈표 31명에 대한 추적에 나선 것이다.

너무 미워하면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31명 추적에 나선 이들은 마치 100퍼센트 찬성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인권도, 다양성도, 정당민주주의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의 가장 큰 강점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꼴이다. 비밀투표도 부정하려고 한다.

이제 공안기관이 주도하던 열차에서 내려와 살아 있는 ‘북극곰’을 볼 차례다.
새누리당은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를 선제적으로 매듭짓고 민생과 미래로 가야 한다. 하루빨리 존재감을 회복해 정치를 살려야 한다. 그것이 진정 박근혜 정부를 돕는 일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이른바 ‘진보’를 재구성할 혁신적인 리뉴얼 구상을 내놓고 실천해야 한다. 과거의 문을 박차고 걸어 나와야 한다. 대북정책에서부터 노동문제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묻고 또 답해야 한다.

유승찬<소셜미디어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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