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이 채소·과일에 후추를 뿌려 먹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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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려야 할 시기에 비가 온다. 올겨울처럼 기후변화를 피부로 느낀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의외의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다. 바로 ‘겨울 식중독’ 환자다. ‘겨울이라 괜찮겠지’ 하고 식재료 관리에 조금 소홀하면 바로 상해버린다.

후추는 후추과의 덩굴 식물로, 그 열매를 양념으로 쓴다. 인도 남부의 말라바 해안이 원산지이다./위키피디아

후추는 후추과의 덩굴 식물로, 그 열매를 양념으로 쓴다. 인도 남부의 말라바 해안이 원산지이다./위키피디아

그러면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관리를 했을까? 요즘처럼 여러 식재료를 한꺼번에 장기간 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일같이 장을 보았을 테고, 바로바로 소진했을 것이다. 채소나 과일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겠지만 육류와 어패류는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패를 막기 위해 소금에 절이고, 바람과 햇살에 숙성시키는 방법을 개발했다. 특히 선원들의 긴 항해에는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필수품이었다.

후추와 같은 향신료가 육류, 어류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명상에 대해 공부하는 동안 동남아 스님들의 일상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채소와 과일을 주로 먹는데, 여기에 후추를 뿌려 먹기도 했다. 단순히 음식이 상하는 것을 우려하거나 맛 때문에 넣는 것이 아니다. 후추와 같은 향신료의 효능을 보면 이해가 된다.

후추의 약제명은 ‘호초(胡椒)’다. 후추과에 속한 상록등본인 호초의 성숙에 가까운 과실이다. 가을부터 이듬해 봄 사이에 암록색을 띨 때 채취해 건조한다. 후추는 흑색·붉은색·녹색·백색이 대표적이다. 후추 열매를 따자마자 말린 것이 흑색으로,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이다. 한의원에서 약재로 사용할 때도 이 흑색을 사용한다. 원산지는 인도로 호초의 호(胡)는 티베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를 지칭한다. 15세기 초 대항해시대에는 후추를 금과 같이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후추는 오장육부 중 위장과 대장에 특히 효과적이다. <동의보감>에는 “성질이 아주 뜨겁고 맛은 맵고 독이 없다. 상기된 기운을 가라앉히고, 속을 따뜻하게 데우며, 노폐물·담음(체액이 잘 돌지 못해 만들어진 병리물질)을 삭이고, 오장육부의 차가운 풍기운을 없앤다. 구토와 설사, 장염으로 인해 명치가 아프면서 차가운 것에 효과가 좋다”고 나온다. 온갖 물고기·육고기·자라·버섯의 독을 푼다고도 소개한다.

권혜진 원장

권혜진 원장

후추는 온중산한(溫中散寒), 즉 속을 따뜻하게 데워 한기를 흩어주는 효능이 탁월하다. 대항해시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주로 어류였고 회로 먹거나 끓여 먹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이때 어류의 독을 중화시켜주고, 차가워진 위장을 따뜻하게 해주는 데 후추만큼 효과가 빠르고 맛 좋은 것이 없었다. 부패를 막고 부드럽게 숙성해주는 데도 효과가 좋다. 육포를 먹을 때 올라오는 알싸한 향과 매콤한 맛이 후추다.

채식주의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몸이 냉해지는 것이다. 차가운 바닥에서 수행하면서 채식을 하다보니 만성 냉복통(冷腹痛)이나 관절통을 호소하는 스님들도 있다. 이때 처방하는 방법 중 하나가 후추다. 물론 오신(五辛)이라 하여 수행자들은 마늘·파·생강·겨자·후추 등과 같은 매운맛을 내 욕정을 동하게 하는 것을 피한다. 하지만 부처의 시대에도 병든 자들에게는 늘 예외를 두었다. 치료를 위해서는 후추를 아낌없이 드시도록 권한다.

<권혜진 청효대동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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