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서 길에게로

변산에서 위도 찍고, 변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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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간다는 것이 때로는 무참할 때가 있다. 떠나는 것은 불치의 병이라고 치고, 그 길 위에서 치유하기 어려운 아픔을 만날 때, 마침내 길은 탄식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토록 가슴 깊이 사랑했던 변산반도를 이제는 무거운 마음으로 가야 한다. 산과 바다와 들판이 어우러진 그 환상의 길을. 그래도 괜찮다. 모든 것을 다 주어버린 다음 비로소 넉넉해진 어미의 품안 같은 변산이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한들 어떻겠는가. 어찌 아픔 없이 사랑이 있겠으며, 사랑 없이 그리움이 있기야 하겠는가. 가노라 새만금아, 다시 보자 위도여.

새만금을 지나며

변산반도를 가기 위해 부안의 들머리에 들어서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시인 신석정이다. 부안 출신의 이 목가 시인은 동문 밖 청구원에서 촛불을 켜고 시를 썼다.

[길에게서 길에게로]변산에서 위도 찍고, 변산까지

그렇지만 지금 부안은 반핵의 촛불로 넘실거리는 곳이 되고 말았다. 생명의 새 새끼들보다 더 많은 젊은 전투경찰의 방패로, 방폐장 건설계획을 겨우 부지해가는 곳이 되고 말았다. 반핵의 노란 깃발이 전체 군민이 보유하고 있는 태극기 수보다 더 많은 곳이 되고 말았다.

섬에서 뭍이 되어버리고만 계화도 간척지는 애써 외면하고 길을 가더라도, 바람모퉁이(참 아름다운 지명이다)를 막 돌아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해창의 너른 갯벌에서마저 눈 감을 수는 없다. 이곳이 바로 새만금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매향의 비원처였고, 백합조개의 주산지였던 비옥한 갯벌은 이제 방조제에 둘러싸여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몸 섞었던 바다와 헤어져, 어쩌면 다시 바다를 바라보지도 못할는지 모른다. 백합조개에 풀꽃상을 바치고, 300걸음 되는 갯벌 위에 다시 매향의례를 치른다 한들 한 번 잃어버린 소생의 기운은 어찌 되찾을 수 있을 것인지.

잠시 변산해수욕장에 들러 힘없이 떨어지는 낙조를 하릴없이 바라본다. 애처로이 남은 붉은 빛마저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린 뒤, 사위는 적조하고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래도 가자.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으니.

[길에게서 길에게로]변산에서 위도 찍고, 변산까지

이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 사이를 갈라놓거나 싸우게 하는 어떤 명분이나 운동에도 반대한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동서로 분열된 것도 모자라 이제 같은 고향 사람끼리 서로 등 돌리고 분쟁하기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서로 흐르고, 서로 감싸안아주라는 것이 내가 길을 다니며 국토로부터 얻어들은 교훈이었다.

TIP 젊은 판사에 의해 중단되었던 새만금공사는 최근 2심법원의 판결에 의해 보강공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어떤 판단이 옳은 것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새만금 갯벌 위에 법정을 세우고, 그곳에 살고 있는 백합조개-갯지렁이-망둥이-찔룩이-저어새 같은 갯것들과 부안의 어린이들을 배심원삼아 판결을 내려보는 것은. 어차피 그 갯벌의 주인은 그들이 아닌가.

위도, 아직도 풍어를 꿈꾸는가

많은 사람에게 그저 바다낚시터 정도로 알려져 있는 위도는 생각보다 사연이 많은 섬이다. 조선 시대 유배지이기도 했으며, 홍길동이 이상향(理想鄕)으로 율도국을 세우려 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조기의 황금어장이었던 칠산 바다의 중심이기도 했다.또 있다. 1993년 10월 10일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한국판 타이타닉 서해 페리호가 침몰했던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위도를 찾아가는 이유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리마을의 띠뱃놀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한때 철따라 서는 파시로 흥성거리던 파장금항에 내려선다. 격포에서 40분간의 뱃길을 이곳 출신으로 보이는 한 할머니의 운구와 함께했다. 뭍의 폭설은 그쳤지만 섬은 아직도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휩싸여 있었다. 곡소리를 따라 느릿느릿 섬으로 오르는데 마음은 왜 이리 차분해지기만 하는 것인지.

[길에게서 길에게로]변산에서 위도 찍고, 변산까지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무녀와 제주를 따라 내려온 오색뱃기는 한동안 풍물놀이로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용왕굿이 끝난 후에는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주산돌기를 따라다니며 대중없이 칠락팔락거렸다. 이윽고 띠배를 띠워보낼 차례가 되었다.

"우리 부락 사고 없이, 우리 배도 사고 없이, 만선일세 만선일세, 조기 실어 만선일세..."

대풍어(大豊漁) 꿈과 마을의 모든 재액을 싣고 고깃배의 뒤꽁무니에 매달려 띠배는 마침내 바다로 떠나간다. 아스라히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띠배를 차마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는 심사는 그저 부질없는 희망들만 뱃전으로 띄워본다. 그렇게 띠배를 송별하고 이번에는 북쪽길을 따라 파장금으로 간다. 장동건 주연의 영화 [해안선]을 찍었다는 논금을 지나, 그토록 깊은 지픈금을 지나, 서해 페리호 사고 위령비를 지나, '위도 문제는 위도에서, 외지인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지나, 다시 파장금항이다. 지독한 눈발 속에서도 우리를 싣고 갈 배는 말없이 묶여 있는데,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TIP정부를 배제한 채 범부안군민대책위를 중심으로 한 방폐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가 2월 14일 치러진다고 한다. 초유의 주민투표로 권리를 되찾겠다는 측과 불법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측으로 맞서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가는데, 그 결과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설마 그럴 리는 없지만 찬성으로 기운다면 그 많던 반대론자는 과연 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도 어렵겠지만 방폐장 건립이 무산된다면 위도를 비롯한 부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야말로 위도를 두 번 죽이는 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길에게서 길에게로]변산에서 위도 찍고, 변산까지

새만금에서 시작해서 위도를 거치면서 깊어진 시름을 잠시 접고 다시 변산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려보자.

흔히 수만 권의 책을 쌓은 것 같기도 하고, 시루떡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는 채석강은 이미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한두 번 가본 사람이라면 좀더 올라가 죽막동 일대를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한겨울에도 싱싱하기만 한 후박나무 큰 이파리와, 적벽강의 검붉은 절벽 밑을 소동파와 함께 거닐어보다가 마침내 벼랑끝에 이르면 수성당이 있다. 서해를 지켜주는 수호신 개양할미가 사시는 집이다. 할머니는 일찍이 여덟 명의 딸을 팔도로 시집보내고 지금은 막내딸과 함께 시누대와 군사용 벙커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 집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 벼랑끝에서 간절한 그리움으로 바다를 바라보면 큰 키에 걸맞은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성큼성큼 섬 사이를 걸어다니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와 남쪽으로 길을 잡으면 모항마을에 닿는다. 호랑이가 등긁개로 사용했다는 호랑가시나무 군락 앞에서 바라보는 한적한 모항마을의 풍경은 그대로 우리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는 어촌 마을의 원형이 된다.

느린 발걸음을 옮겨 작당마을과 왕포마을을 지나면 내소사 가는 길이 나온다. 미당 서정주가 [내소사 대웅전 단청]이라는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이 절 법당의 단청은 화공을 가장한 호랑이가 칠하다 말았다는 것인데, 자기 작업을 엿본 사미승의 불경스러운 잘못으로 죽은 호랑이가 내세에서라도 소생하기를 바라서 절 이름이 내소사라는 것이다.

[길에게서 길에게로]변산에서 위도 찍고, 변산까지

젓갈과 소금밭으로 유명한 곰소항도 입맛과 눈맛을 한나절은 넉히 누릴 수 있는 곳이지만, 잠시 우동리로 빠져 마을 입구의 커다란 당산나무 아래서 마음을 가다듬어볼 일이다. 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지었다는 이곳 우반동(우동리의 옛이름)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당산제가 열리는데, 제사가 끝난 후 마을 사람들은 남녀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한다.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기에 힘있는 남자들이 일부러라도 항상 져준다.

우리네 삶은 이런 것이었다. 경쟁과 생존의 법칙만으로는 도저히 풀 길 없는 삶의 여유가 나는 다만 부러울 따름이었다. 지금은 그나마 짐대 몇 마리와 서로 기대어 힘겹게 서 있는 늙은 당산나무 아래서.

TIP어찌 변산을 다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건성건성 건너왔는데도 이것이 끝이 아니다. 내변산이 속 깊게 숨겨둔 숲과 계곡, 기암과 절벽은 또 어쩔 것이며, 진서리와 유천리의 도요지들, 울금산성 아래 짧아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길로 우리를 맞이하는 개암사는... 어떨 때는 산으로, 그러다가 바다로, 내쳐서 들판으로 달리는 변산반도의 굽이굽이를 돌다보면, 최근에 들어선 감교리의 '원숭이 학교'((063)584-0708)조차 그냥 익살로 순순히 받아줄 수 있는 여유를 우리는 어느새 갖게 되는 것이다.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편집회사 투레 대표〉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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