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배구할 분 구합니다” 강 스파이크 날리는 여자배구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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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 관람 넘어 직접 코트에 뛰어드는 여성 늘어…‘운동하는 여성’ 대한 호응 영향도

지난 8월 9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의 한 체육관 배구 코트. 세명의 여성이 강사의 손에 놓인 배구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 올리고, 때리고, 넘겨!”

지난 8월 9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체육관에서 배구를 배우고 있는 여성들이 포즈를 취했다. / 송윤경 기자

지난 8월 9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체육관에서 배구를 배우고 있는 여성들이 포즈를 취했다. / 송윤경 기자

강사가 공을 던지자 세사람이 바쁘게 움직였다. 첫 번째 사람이 날아온 공을 받아 올리면(리시브), 두 번째 사람은 그 공을 세 번째 사람에게 넘기고(토스), 세 번째 사람은 공을 네트 너머로 보내는(공격) 연습이었다. TV중계로 볼 때는 간단해 보였지만, 예상대로 실전은 쉽지 않았다.

실패가 계속되면서 ‘역시 어렵구나’ 하는 생각에 잠길 무렵, 처음으로 성공적인 ‘3박자’가 만들어졌다. 지켜보던 수강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한번 성공 사례가 나오니, 또 다른 수강생들로 ‘교체’된 이후에도 3번 연속 터치가 심심찮게 이어졌다.

배구공을 찾는 여자들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의 ‘4강 신화’ 이후 여자배구 열풍이 심상찮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반응이 뜨겁다. 이들은 SNS에서 다가오는 코보(KOVO)컵 경기일정을 공유하며, 응원 선수의 영상등을 올리고 있다.

나아가 직접 배구 코트에 뛰어드는 여성도 늘고 있다. “도쿄올림픽 이후 여성들의 문의전화가 20통이나 와 놀랐다”는 배구동호회 대표(경기지역의 한 배구동호회, 강모씨)가 있는가 하면, 빗발치는 문의에 수업을 늘린 배구교실도 있다. 9일 찾은 배구교실에서도 수강생 9명 가운데 7명이 10~30대 여성이었다. 아마추어 배구인들이 운영하는 ‘렛츠고 생활체육 배구’ 카페의 경우 지난 열흘간 회원수가 220여명 늘었고, 그중 여성 비율이 더 높았다고 한다. 배구에 빠져든 20~30대 여성들의 얘기를 들었다.

“해보자, 해보자, 후회없이, 후회없이!”

김연경 선수의 작전타임 명언은 지난 7월 29일 도미니카공화국과의 승부에서 15:9로 점수차가 벌어지던 시점에 나왔다. 김연경 선수의 외침에 다른 선수들은 우렁찬 “파이팅”으로 화답했다. 김연경 선수와 선수생활을 함께했던 MBC 황연주 해설위원은 ‘해보자’와 ‘후회없이’를 반복하는 그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기고 지는 걸 떠나서 그 목소리가 너무…”(황 해설위원). 이날 한국 대표팀은 5세트 접전 끝에 도미니카공화국을 눌렀다.

스포츠에 관심 없던 허가영씨(가명·20)의 마음을 흔든 건 이와 같은 ‘여자들의 파이팅’이었다. 지난해 대학에 입학한 그는 코로나19 때문에 주로 자취방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었다. 홀로 지내는 날이 많아지면서 외로움에 시달렸고, 최근엔 경북 포항의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우연히 올림픽 여자배구 경기를 보게 됐다. 그는 “여자들이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면서 강렬한 에너지를 느꼈다, 요새 내가 무기력하게 지내왔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지난 8월 8일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이 끝난 후 김연경 선수와 동료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8월 8일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이 끝난 후 김연경 선수와 동료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돌이켜보니 가영씨는 배구를 즐긴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수행평가 때문에 배구를 했다. 패스 정확도 등을 기준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나름대로 반 대항전도 펼쳤다. 경기 승패는 수행평가 점수와 관계가 없어 잠시나마 즐거웠다고 한다. 3년 전의 일인데도 그는 아련한 듯 말했다. “지금은 30명의 여자(당시 학급 친구들)를 다시 구할 수가 없잖아요. 생각해보니까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서사가 풍성한 여자배구

가영씨의 학교 커뮤니티에선 “여자배구 동아리를 만들자”는 제안이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아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려 여자배구 동아리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탤 계획”이라고 했다. 지금은 오픈채팅방을 통해 또래 여성들과 연습 일정을 논의하고 있다.

허가영씨와 동갑인 박하나씨(가명·20) 역시 배구를 배우기 위해 나선 20대 여성 중 한명이다. “인기 있는 배구카페엔 거의 다 가입했다”는 그는 “이왕이면 비슷한 처지의 또래 여성들과 운동하고 싶어 적절한 동호회를 계속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지금 당장 뛰고 싶은 마음은 집 앞 공터에서 홀로 배구공을 튀기며 달래고 있다. 며칠 전 스포츠용품점을 찾아 배구공을 샀다고 한다.

배구를 배우기 위해 나선 이들 중엔 허가영씨, 박하나씨처럼 “도쿄올림픽 때 눈을 떴다”는 이들이 많았지만 “몇년 전부터 여자배구를 봐왔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달째 사설 배구교실을 다니고 있는 직장인 손윤아씨(32)가 그런 경우다. 그는 “배구팀이 있는 재단의 고등학교에 다닌 덕에 배구를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대학에 들어가고 취업하면서 거의 잊고 지냈다”면서 “그러다 2~3년 전부터 여자배구를 재밌게 봤고, 다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체육관에서 배구를 배우고 있는 20대 여성이 리시브 연습을 하고 있다. / 송윤경 기자

서울 서대문구의 한 체육관에서 배구를 배우고 있는 20대 여성이 리시브 연습을 하고 있다. / 송윤경 기자

손씨가 여자배구에 흥미를 느끼던 무렵은 여자 프로배구의 인기가 남자 프로배구를 뛰어넘은 시점과 겹친다. 사실 여자배구의 ‘물밑 인기’는 도쿄올림픽 이전부터 만만치 않았다. 특정팀의 장기독주와 용병 의존이 두드러졌던 남자배구와 달리 여자배구는 매년 치열한 승부를 펼쳐 흥행에 거듭 성공해왔다. 경기당 평균 관중 규모는 2018~2019시즌부터, TV시청률은 2019~2020시즌부터 여자배구가 남자배구를 제쳤다.

불꽃 튀는 접전이 잦기 때문일까. 여자배구는 서사가 다채롭다. 지난 시즌만 해도 그랬다. 김연경 선수를 품에 안은 흥국생명은 ‘우승 0순위’로 꼽혔지만 이재영·이다영 선수의 퇴출로 전력에 공백이 생겼다. 김연경 선수는 어떻게든 팀 역량을 끌어올리려 분투했으나 승자는 단단한 팀워크의 GS칼텍스였다.

여자배구 ‘찐팬’을 자처하는 직장인 김은영씨(가명·35)가 꼽는 매력도 바로 ‘서사’다. 그는 “우주스타인 김연경 선수도 물론 좋아하고 올림픽 경기도 모두 짜릿했지만, 마음을 가장 울린 건 올해 초 김유리 선수 인터뷰였다”고 말했다.

김유리 선수는 11년 전 입단한 흥국생명에서 한 선배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가시밭길을 걷게 된 인물이다. 코트를 떠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여러팀을 거쳐 현재 GS칼텍스에서 뛰고 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자신에게 ‘고난’을 안겼던 흥국생명에 승리를 거둔 날, 그는 ‘오늘의 선수’로 뽑혀 방송 인터뷰를 했다. “저는 (이런 인터뷰를) 평생 못할 줄 알았어요.” 이때 GS칼텍스 선수들은 김유리 선수 앞에 옹기종기 모여 그를 응원하는 ‘자매애’를 보여줬다. 당시 사진이 최근 SNS에서 다시 공유되고 있다.

지난 8월 9일 터키의 비영리단체인 환경단체연대협회(CEKUD)가 한국 여자배구 팬들의 묘목 기부에 대한 감사 메시지를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 CEKUD 홈페이지 캡처

지난 8월 9일 터키의 비영리단체인 환경단체연대협회(CEKUD)가 한국 여자배구 팬들의 묘목 기부에 대한 감사 메시지를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 CEKUD 홈페이지 캡처

김은영씨는 “선수마다 성장사가 있고, 또 선수끼리의 케미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면서 “요즘 SNS엔 자기가 좋아하는 팀, 좋아하는 선수를 ‘영업’하기 위한 글이 많다”고 했다.

트위터를 중심으로 불어난 여자배구 팬들은 최근 선행도 펼쳤다. 8강전에서 한국에 패배한 터키 선수들은 ‘산불로 힘든 터키인들을 웃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못 지켰다며 주저앉아 통곡했다. 이때 트위터에선 ‘터키에 묘목을 기부하자’는 아이디어가 삽시간에 퍼졌고, 많은 이들이 ‘김연경’, ‘팀 코리아’ 등의 이름으로 기부에 동참했다.

여자배구 기념품 판매량도 치솟고 있다. 배구 국가대표팀 공식스토어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엔 유니폼 주문이 한달에 한건 들어올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주문량을 소화하기가 버거울 정도”라고 말했다.

배구하는 여자가 멋있다

“여자배구가 내 마음속에 불꽃을 일으켜준 것 같다”고 말하는 양여진씨(25)도 최근 팬 티셔츠와 달력을 구입했다. 대학원 시험을 준비 중인 그는 “김연경 선수와 여자배구팀을 보면서 지금의 ‘힘듦’도 인생에 필요한 것이고, 결국 부딪쳐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기념품 구입에 이어 ‘○○지역에서 함께 배구 연습할 20대 여성을 찾는다’라는 글도 배구 카페에 올렸다. 그는 앞으로 ‘보는 배구’와 ‘하는 배구’를 모두 누리고 싶다고 말한다.

배구 국가대표팀 공식스토어 측이 최근 주문과 관련한 문의전화가 빗발치자, 추가로 공지사항을 게시했다. / 대한민국 배구국가대표팀 공식스토어 캡처

배구 국가대표팀 공식스토어 측이 최근 주문과 관련한 문의전화가 빗발치자, 추가로 공지사항을 게시했다. / 대한민국 배구국가대표팀 공식스토어 캡처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스포츠 종목엔 늘 ‘반짝 관심’이 잇따랐다. 이번 배구 열풍 역시 찰나의 현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의 흐름을 볼 때 스포츠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 자체는 쉽게 식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손희정 대중문화평론가는 “여성들 사이에서 불고 있는 배구 열풍은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5~6년간 ‘스포츠하는 여자가 멋있다’는 공통의 감각이 만들어져 온 것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몸 단련과 땀 흘리는 운동을 즐기는 여성이 대거 등장한 흐름과 최근 여성들의 ‘배구 열광’이 맞닿아 있다는 얘기다. 여성 스포츠 스타만을 내세운 <노는 언니>, ‘민경장군’(코미디언 김민경)을 발견한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 여성 방송인들이 축구하는 <골 때리는 그녀> 등이 큰 호응을 얻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8월 9일 배구교실에서 만난 박자영씨는 “여자배구 대표팀이 올림픽 준비를 할 때쯤” 배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 이 무렵 여자배구 대표팀은 우려의 시선을 받는 처지였다. 올림픽 전초전 격의 VNL(발리볼네이션스리그)에서 ‘3승 12패’의 저조한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러니 4강 진출은 그야말로 대역전 드라마였다. 배구공을 든 박자영씨는 “끝까지 열심히 한 그들을 닮고 싶다”고 했다.

“좋아요. 공을 끝까지 따라왔기 때문에 기회가 생긴 거예요. 안 왔으면 기회가 없었을 거예요.” 누군가 어려운 리시브에 성공하자 강사가 말했다. 박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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