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선발투수진, 승부구는 ‘느린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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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4일, 미국 플로리다주 더니든 바비매틱트레이닝센터는 취재진으로 북적였다. 미국 현지 취재진은 물론 한국·일본 취재진이 대거 몰려들었다. 바비매틱트레이닝센터는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스프링캠프 훈련 센터다. 주경기장 TD볼파크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인 이곳에 한·미·일 취재진 60여 명이 찾아 취재 경쟁을 벌였다. 여러 선수가 있었지만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 류현진이었다. 미국 취재진이 말했다. “LA 다저스에서는 (클레이턴) 커쇼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당신이 에이스다.”

2월 19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더니든에서 류현진이 훈련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월 19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더니든에서 류현진이 훈련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류현진이 토론토 에이스로서의 첫 훈련을 시작했다. 백업포수 리즈 맥과이어를 상대로 가볍게 불펜 피칭을 했다. 가지고 있는 여러 구종을 테스트하는 자리다. 류현진이 던지는 공 하나하나에 관심이 쏠렸다. 류현진은 “에이스라는 생각보다는 젊은 선수들과 친해지면서 경기를 재밌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발투수 대부분 변화구 구사율 높아

류현진은 짐짓 가벼운 마음인 척했지만 토론토 구단이 류현진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다르다. 토론토 찰리 몬토요 감독은 “류현진이 계약했을 때부터 기뻤다. 굉장히 흥분된다”며 “우리는 에이스를 얻었다. 그는 에이스다. 그가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우리가 이길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고, 바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토의 기대감은 계약에서 나타난다. 류현진과 맺은 4년 8000만 달러 계약은 토론토 사상 최대 자유계약선수(FA) 계약 신기록이다. 돈을 쓴 이유가 있다. 토론토 선발진은 엉망진창에 가까웠다.

2019시즌 토론토 투수 중 한 차례 이상 선발 투수로 나선 투수는 모두 21명이나 된다. 5선발 로테이션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는 뜻이다. 토론토 선발진의 평균자책점은 5.25나 됐다. 메이저리그 평균자책 1위를 차지한 류현진의 2.32의 두 배에 조금 못 미친다. 선발투수들의 대체선수대비 승리기여(WAR) 기록은 조금 더 심각하다. 선발투수들을 다 합해 7.2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겨울 투수 FA 최대어였던 게릿 콜(현 뉴욕 양키스)이 혼자 기록한 WAR 7.4에도 못 미친다. 21명의 투수가 용을 썼어도 게릿 콜 한 명보다 못했다는 얘기다.

토론토는 겨우내 선발 투수진 보강에 애를 썼다. 류현진과 FA 계약을 한 것은 물론 태너 로아크·체이스 앤더슨을 데려왔다. 포스팅에 나선 요미우리 출신의 야마구치 슌도 영입했다. 에이스 류현진을 시작으로 로아크·맷 슈메이커·앤더슨까지 4선발을 구성한 뒤 유망주인 라이언 보루키·트렌트 손튼 등이 5선발 자리를 다툴 예정이다.

이번 로테이션 구성에는 특별한 전략이 숨어 있다. 이른바 ‘느린 공 전략’이다. 무시무시한 강속구 투수는 어차피 비싸다 치더라도, 평균 구속이 떨어지는 투수들을 끌어모았다. 여기에 느린 변화구(오프스피드) 구사율이 높은 투수들이 대부분이다. 파워와 스피드를 강조하는 시대에 거꾸로 느린 공을 잘 던지는 투수들을 끌어모았다. 단지 ‘가성비’를 통한 ‘머니볼’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류현진과 앤더슨, 슈메이커는 모두 느린 변화구 구사 비율이 높은 투수들이다. 2019시즌 기준 느린 변화구 구사율에서 류현진은 27.5%, 앤더슨은 24.8%, 슈메이커는 33.3%나 됐다. 5선발 후보인 보루키 역시 체인지업 구사 비율이 23.1%나 된다. 일본에서 온 야마구치도 포크볼을 주무기로 삼는 투수다.

느린 공은 나름의 장점을 갖는다. 삼진을 잡아내기는 어렵지만 정확히 때리기 어려운 공인 만큼 강한 타구를 덜 허용한다. 타구 속도를 억제할 수 있다면 장타 허용을 줄인다. 류현진이 가진 장점이다. 류현진은 지난 시즌 허용 타구 평균 속도가 82.5마일에 그쳤다. 2018시즌에는 79.9마일로 더 낮았다. 강한 타구의 기준이 90마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류현진은 빗맞은 타구를 많이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장타 허용을 줄였다. 체이스 앤더슨 역시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허용 타구 평균 속도가 82.4마일밖에 되지 않았다. 체인지업은 삼진을 잡기 어렵지만 타구 속도를 떨어뜨리는 효과적인 구종이다.

같은 손 타자에 더 강한 ‘역 스플릿’ 투수들

토론토의 홈구장 로저스센터는 메이저리그 대표적인 타자 친화 구장이다. 구장 크기가 비교적 작기 때문에 장타 허용이 많다. 류현진이 빨리 적응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류현진의 장점이기도 하다. 맞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덜 강하게’ 맞으면 된다. 토론토가 ‘느린 공 전략’을 세운 것은 홈구장의 특성을 고려한 결과다.

류현진을 비롯한 선발투수진이 같은 손 타자에게 더 강한 ‘역 스플릿’ 투수라는 것도 토론토가 노리는 ‘느린 공 전략’의 또 하나의 장점이다.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하는 류현진과 앤더슨은 각각 우타자, 좌타자 상대로 더 강했다. 우완 로아크는 좌타자에게 약했지만 슈메이커와 손튼은 좌우 타자 상대 성적이 비슷한 수준이다. 메이저리그는 좌투수에게 우타자를, 우투수에게 좌타자를 배치하는 플래툰 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다저스 시절에도 류현진을 상대하는 팀들은 우타자 위주의 라인업을 구성했다. 류현진은 오히려 우타자들을 잘 잡아냈다. 체인지업 등 느린 변화구를 주무기로 삼으면서 상대의 플래툰 전략이 좀처럼 통하지 않는 투수들은 효율이 높아지는 리그 환경이다.

느린 공 투수가 가진 또 다른 장점은 부상 가능성이 적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리틀야구 선수들에게 커브를 금지시켰다. 손목을 많이 사용하는 구종이 어린 선수에게 부상 위험을 키울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투수의 부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구종은 ‘강속구’라는 점이 드러났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일수록 부상 위험성이 높아진다. 체인지업은 부상과 가장 거리가 먼 구종이다. 팔꿈치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구속에 따른 과부하도 걸리지 않는다. 토론토 선발진을 구성하는 류현진과 슈메이커, 보루키 모두 부상에서 돌아온 선수들이다. 부상 전력이 있지만 강속구 투수들이 아니고, 이는 거꾸로 체력 관리와 함께 부상 가능성을 낮추는 증명서로 기능한다. 토론토 구단이 선발 로테이션 재구성에 있어 ‘느린 공 투수’ 전략을 세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타자 친화적 구장에서 타구 속도를 줄이고, 상대 플래툰 전략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면서 부상 가능성도 낮출 수 있다.

다만 토론토의 ‘느린 공 전략’에도 마지막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선발진의 삼진 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인플레이 타구가 많이 발생한다. 페어 그라운드를 향하는 타구를 수비진이 얼마나 잘 처리하느냐가 숙제다. 2019시즌 수비 능력을 측정하는 UZR 지수에서 토론토 수비진은 뒤에서 다섯 번째였다. 신인급으로 채워진 내야진이 수비력을 얼마나 성장시키느냐가 토론토 느린 공 전략 성공 여부를 가르는 열쇠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용균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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