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베트남 관계 증진에 촉매제 역할
박 감독은 이미 베트남의 국민 영웅이다. 한국 현 정부가 추진하는 신(新)남방정책의 핵심 축이 베트남이라는 점에서 ‘바캉스 매직’은 앞으로 정치·경제 등 양국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촉매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감독이 지난 8월 19일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조별리그 D조 일본전 도중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베트남 남자축구가 아시안게임 4강에서 한국과 맞붙은 지난 8월 29일 베트남 전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세찬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길에는 수십만 명의 인파가 베트남 깃발을 흔들며 환호했다. 한국에 3골을 내줬을 때 숨죽였던 사람들은 후반 25분 만회골이 터지는 순간 ‘홍염’을 터뜨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길거리에서는 “바캉스(박항서 감독의 현지 발음) 꼴렌(힘내라)”이라는 구호가 반복됐다.
베트남은 요즈음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의 대한민국처럼 뜨겁다. 박항서 감독(59)이 23세 이하(U-23)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4강에 오른 덕이다. 베트남에서 축구는 국민 스포츠다. 박 감독이 지난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준우승했을 때도 베트남은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그런데 와일드 카드로 참가한 성인 국가대표 선수가 메이저 대회로 분류되는 아시안게임에서 역대 최고 성적인 4강에 올랐으니 난리가 날 법도 했다.
베트남 국민이 흥분하는 것은 아시아가 아닌 동남아시아에서도 약체로 분류되던 베트남이 지난해 10월 박 감독의 부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종전 아시안게임 최고 성적은 2010년 광저우 대회, 2014년 인천 대회의 16강이었다.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다보니 베트남 방송사들은 이번 대회는 최대 300만 달러(약 33억원)에 달하는 중계권조차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구입하지 않았을 정도다. 그런데 박 감독의 조련으로 강팀으로 변신한 베트남은 지금껏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일본까지 꺾는 전승 행진으로 4강까지 올랐다.
베트남 축구 역사 새로 쓴 ‘파파 리더십’
비록 박 감독의 조국이자 넘을 수 없는 벽이라던 한국에 1-3으로 완패했지만 4강이라는 상징성에 들끓었다. 하노이 교민 조덕상씨는 “경기는 1대 3으로 졌지만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면서 “베트남에서는 아시안게임 준결승전에 진출한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박 감독이 베트남 지휘봉을 잡기 전에는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한·일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72)을 보좌해 경남FC와 전남 드래곤즈, 상주 상무 등 숱한 프로팀을 맡았던 화려한 이력도 옛말. 그는 3부리그 격인 실업축구 창원시청 감독이었다. 박 감독은 “베트남으로 떠난 것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나는 더 이상 한국에선 활동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고 고백했다. 그랬던 박 감독은 베트남 선수들을 만나면서 과거 한국 축구의 4강 기적에 기여했던 경험들을 풀어내 바캉스 매직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인생도 바꿨다.
박 감독은 이미 베트남의 국민 영웅이다. 지난 1월 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으로 베트남 정부에서 3급 노동훈장을 받았던 그가 이번에는 어떤 대우를 받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축구전문가들은 박 감독이 빚어낸 바캉스 매직의 비결을 먼저 스포츠 과학에서 찾는다.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선수들의 근육량과 심폐지구력, 근지구력 등의 정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관리시스템을 도입했다. 과거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 부임하면서 과학적인 체력훈련을 도입한 것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또 나이나 평판에 상관없이 새로운 선수를 발굴하고 경기에 중용해 경쟁의식을 부추기면서 패배의식에 갇혔던 베트남 선수들을 바꿔놨다. 박 감독은 조직력을 극대화한 전술을 가르치면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질 이유가 없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경기가 안 풀릴 땐 서슬 퍼렇게 고함을 지르고, 골을 넣으면 히딩크식 ‘어퍼컷 세리머니’로 기쁨을 표현한다.
한-베트남 경제·외교 관계도 술술 풀려

베트남 축구팬들이 지난 8월 27일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시리아전에서 베트남팀이 승리하자 거리로 나와 환호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박 감독의 손길이 가장 먼저 효과를 본 것은 수비다. U-20 월드컵을 경험한 트란 딘 트롱과 도 두이 만, 딘흐 트롱 등을 중심으로 조직력을 다졌다. 이번 대회에서 베트남은 포백과 스리백을 자유롭게 오가는 짠물수비로 상대들을 괴롭혔다. 한국을 만나기 전까지 5경기에서 7골을 넣는 동안 단 1골도 내주지 않았다.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축구가 발은 빠르지만 체력과 조직력이 약해 늘 수비에 구멍이 뚫렸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박 감독의 수비가 외세의 침략에 두려워하지 않는 베트남 특유의 강인한 본성을 일깨웠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바캉스 매직의 또 다른 기반인 친근한 리더십도 빼놓을 수 없다. 박 감독은 베트남 문화를 면밀히 관찰한 뒤 그 문화를 존중하면서 한 발짝 다가섰다. 다친 선수는 직접 어루만지고, 생일을 맞은 선수에게는 손편지를 썼다. 이른바 ‘파파 리더십’이다. 수비수 딘흐 트롱은 대회 도중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선수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감독님’이라는 글과 함께 박 감독이 선수의 발을 정성스럽게 마사지하는 영상을 올린 것이 대표적이다. 박 감독은 “선수들과 친해지는 방법”이라며 “기분이 좋으면 세게 쓰다듬고, 졌을 때는 등을 토닥여준다”면서 웃었다. 베트남 일간 <탄 니엔>의 케니우스 기자는 “베트남은 두 대회를 거치면서 확실히 한 팀이 됐다”며 “베트남 축구 역사에서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바캉스 매직은 베트남을 넘어 한국까지 번지고 있다. 한·일월드컵을 떠올리게 만드는 종교적인 수준의 인기에 따라 한국의 외교와 경제까지 술술 풀리게 만든다. 지난 6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던 ‘K푸드 수출상담회’의 흥행에 성공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우리 기업이 출품한 컵떡볶이 한 품목에서만 1000만 달러 이상(약 110억원)의 계약이 이뤄졌다. 단지 박 감독이 홍보대사라는 이유로 거둔 깜짝 놀랄 성과였다. 자연스레 국내 기업들의 기대감도 커진다. 특히 현 정부가 추진하는 신(新)남방정책의 핵심 축이 베트남이라는 점에서 ‘바캉스 매직’은 앞으로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양국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촉매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일찌감치 베트남의 국민 기업으로 자리잡은 삼성전자를 비롯해 포스코, 효성, SK, 한화, LG 등 재계는 베트남 투자를 확대하며 현지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김도현 주베트남 대사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든 정치인이든 남녀노소 구분 없이 박 감독이 큰 인기”라며 “(박 감독과) 동행만 하면 외교협력도 쉽게 나온다. 지금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호찌민(베트남 초대 대통령) 다음의 인기인”이라고 말했다.
<황민국 스포츠경향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