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름은 “매스스타트에 입문한 뒤에는 예전처럼 쇼트트랙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며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인 내가 유럽 선수들을 이긴 것은 쇼트트랙 출신인 덕”이라고 설명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을 1년 앞두고 빙판의 금빛 기대주가 탄생했다. 얼음 위의 마라톤으로 불리는 스피드스케이팅 매스스타트에서 세계 1인자로 떠오른 김보름(24·강원도청)이 주인공이다. 1993년 정월 대보름(음력 2월 6일)에 태어나 보름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는 대보름달이 뜬 다음날 제대로 사고를 쳤다.
김보름이 2월 12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2017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종목별 세계선수권 여자 매스스타트에서 0.11초 차이로 1위로 골인해 60점으로 일본의 다카기 나나(40점)을 제치며 극적인 역전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평창올림픽의 리허설 격인 이 대회에서 첫 정상에 오른 김보름은 “생일선물을 받은 느낌”이라며 활짝 웃었다.
김보름은 400m 트랙 16바퀴를 돌아 순위를 가리는 매스스타트에 입문해 운명이 바뀐 선수다. 사실 그는 국내에서 인정받던 것과 달리 국제무대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2013년 러시아 소치대회에서 단체 종목인 팀추월에서 동메달을 딴 게 최고 성적이었다. 그러나 2015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매스스타트를 평창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한 뒤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김보름은 “매스스타트가 아니었다면 난 평범한 선수로 은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보름은 이번 시즌 출전한 월드컵 매스스타트에서 금메달 2개, 동메달 2개를 따며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지난해 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로 아쉬움을 남겼던 김보름은 1년 만에 실력을 끌어올려 당당히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2월 12일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7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매스스타트에 출전한 김보름이 종료 직전 역전에 성공하며 선두로 질주하고 있다. / 연합뉴스
매스스타트로 바뀐 김보름의 운명
이날 4바퀴를 남겼을 때만 해도 금빛 전망은 어두웠다. 김보름은 체격조건이 좋은 외국 선수들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느라 좀처럼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김보름은 마지막 세 바퀴째 4위로 선두권에 붙었고,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쇼트트랙 선수답게 레인 안쪽으로 파고들며 앞으로 치고 나왔다. 결국 1위를 달리던 다카기를 따라잡으며 금빛 보름달을 띄웠다.
김보름은 “세계랭킹 상위권 선수들을 의식하다 다른 선수들이 치열한 몸싸움으로 선전해 깜짝 놀랐다”며 “반 바퀴를 남긴 시점에선 네덜란드 선수가 넘어졌는데, 안쪽이 아닌 바깥쪽으로 파고들었다면 나도 넘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코너를 돌면서 일본 선수는 꼭 추월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고 덧붙였다.
매스스타트는 기록경기가 아니라 쇼트트랙처럼 순위를 가리는 종목이다. 코너를 얼마나 날렵하게 통과하느냐에 따라 메달 색깔이 달라진다. 쇼트트랙을 타다가 2010년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김보름에게는 안성맞춤이다. 김보름은 “매스스타트에 입문한 뒤에는 예전처럼 쇼트트랙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며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인 내가 유럽 선수들을 이긴 것은 쇼트트랙 출신인 덕”이라고 설명했다.
장점인 코너는 1년 뒤 평창올림픽이 열릴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의 특수한 환경에 더욱 도드라졌다.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은 가장 안쪽 레인인 웜업존(경기를 앞둔 선수들이 몸을 푸는 레인)의 폭이 5m로 다른 경기장보다 1m가 넓다. 폭이 1m 늘어나면서 웜업존의 곡선주로는 안쪽으로 살짝 들어간 형태가 됐다. 김보름은 가파른 곡선주로에서 체력을 비축해 막판 역전극의 발판을 마련했다. 평소 김보름이 훈련하던 태릉 국제빙상장과 똑같은 구조라 가능했던 일이다. 김보름은 “유럽 선수들이 다른 경기장보다 작은 원을 그리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나는 빙질 자체는 태릉과 다르지만 구조가 같아 유리했다”고 말했다.

김보름만 웃은 올림픽 리허설은 고민
김보름이 자신의 약점을 줄이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도 효과를 봤다. 쇼트트랙 출신인 그는 상대적으로 초반 스타트와 직선주로 주파능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보름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 스피드스케이팅 최단거리인 500m에 매진했다. 김보름은 “직선주로에서의 순간 스피드를 키우기 위해 주종목이 아닌 500m 훈련을 했다”고 밝혔다.
김보름은 직선주로 훈련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2월 9일 열린 3000m 종목에서 한국 신기록(4분3초85)을 작성하며 세계 수준에 근접한 것이다. 매스스타트에서도 직선주로에서 다른 선수들에게 크게 밀리지 않았다. 이 같은 성장세라면 평창올림픽에서 매스스타트뿐만 아니라 3000m에서도 메달권 진입을 기대해볼 만하다. 김보름은 “정상급 선수들과 격차를 줄였다는 점에서 만족한다”며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실력을 키우겠다”고 말했다.
김보름의 활약이 반가운 것은 그가 안방 ‘노 골드’의 위기를 끊었기 때문이다. 평창올림픽 개막을 1년 앞둔 리허설로 열린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이상화(28)만 여자 500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을 뿐 나머지 선수들은 시상대에 서보지도 못했다. 금메달 후보로 거론됐던 이승훈(28)이 남자 팀추월에서 한 바퀴 반을 남기고 넘어지면서 실격된 영향이 컸다. 오른쪽 정강이가 찢어진 이승훈은 주종목인 매스스타트에는 출전조차 못했다. 2015년 네덜란드 헤렌벤 대회에 이어 2년 만에 금메달 없이 대회를 마칠 뻔했던 순간이다.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에서 부진했던 것에 우려하고 있다. 제갈성렬 SBS 해설위원은 “전반적으로 우리 선수들의 몸이 무거웠다. 냉정하게 성적을 돌아보면서 선수들이 대회를 치를 때 컨디션 관리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박승희(25)는 대회 출전을 앞두고 노로 바이러스 감염으로 애를 먹었다. 그가 이번 대회 여자 500m에서 자신의 최고기록을 38초52로 앞당겼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바꿔 말하면 박승희가 정상 컨디션을 유지했다면 더 나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었다. 불운에 눈물을 흘린 이승훈 역시 마지막까지 체력을 유지하지 못한 것이 부상의 원인이었다.
평창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제갈성렬 해설위원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전략종목을 얼마나 다듬느냐가 관건”이라며 “김보름이라는 기대주와 이승훈이 버티는 남·여 매스스타트와 이상화가 나설 여자 500m, 팀추월 등에서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스스타트는 선수들이 한꺼번에 출전해 레인 구분 없이 400m 트랙 16바퀴를 돌아 순위를 가린다. 4·8·12번째 바퀴를 돌 때 1~3위까지 각각 5점·3점·1점이 주어진다. 반면 마지막 16번째 바퀴를 돌 때는 1~3위에게 60점·40점·20점으로 상당히 높은 점수가 부여된다. 사실상 마지막 바퀴의 순위가 최종 순위가 되는 경우가 많다. 매스스타트는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처음 도입됐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정식 종목이 됐다. 쇼트트랙처럼 치열한 몸싸움과 신경전이 필수지만 다른 선수와 충돌해 넘어뜨리면 실격된다. 또 한 바퀴를 추월당해도 실격 처리된다.
<황민국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