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분석관 차두리, ‘불통’을 뚫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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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는 슈틸리케 감독이 언어와 문화 차이로 선수들의 오해를 사고 있다는 판단 아래 해결사로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차두리를 해결사로 낙점한 것으로 보인다.

“내 이른 은퇴를 처음 후회했죠.”

축구대표팀 전력분석관이라는 어색한 직함을 받아든 차두리(36)는 ‘난파 직전에 몰린 배’에 뛰어든 심정을 묻는 질문에 잠시 두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이렇게 표현했다. 자신이 너무 빨리 은퇴해 러시아로 향하는 항로가 흔들린다는 생각에 밖에서만 지켜볼 수 없었다는 뜻이다.

차두리가 1년 7개월 만에 슈틸리케호의 승조원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3월 31일 뉴질랜드와의 A매치에서 국가대표 은퇴식을 치렀던 그는 이제 전력분석관으로 대표팀을 돕는다.

지난해 FA서울에서 축구화까지 벗은 차두리는 독일에서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의 일상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실패로 끝난 10월 11일 한국 축구의 이란 원정(0-1 패) 직후였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전력분석관으로 울리 슈틸리케 축구대표팀 감독(62)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고민 없이 수락했다.

한국 축구대표팀 전력분석관으로 선임된 차두리가 10월 27일 서울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축구대표팀 전력분석관으로 선임된 차두리가 10월 27일 서울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벤치에서 대표팀 소통 가교역할 기대

차두리는 10월 27일 서울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당시 결정을 떠올리며 “나에게 국가대표로서의 자부심은 돈이나 명예를 뛰어넘는 중요한 가치”라며 “내 선수인생 마지막에 큰 선물을 주신 슈틸리케 감독님과 후배들을 돕고 싶었다. 한국이 러시아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직함은 전력분석관이지만 사실상 코칭스태프다. 그는 독일에서 B급 라이선스를 땄지만, 아직 성인 선수를 지도할 수 있는 A급 라이선스는 취득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차두리가 전력분석관으로 벤치에 앉는 것으로 상황을 조율했다. 과거 홍명보 감독이 은퇴한 직후 라이선스 없이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한국 축구를 잘 모르는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보좌한 것과 같은 사례다.

최근에는 이란이 은퇴한 자바드 네쿠남을 코치로 뽑아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의 승승장구를 돕고 있다. 케이로스 감독이 이란 축구협회와 쉼없이 마찰을 빚으면서도 아시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유다. ‘네쿠남 효과’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한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네쿠남을 보면서 차두리를 떠올렸다”며 “타이틀만 전력분석관을 달았을 뿐, 벤치에서 대표팀에 필요한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편법이라 생각된다면 날 비판해달라”고 말했다.

협회가 편법 논란을 자처하면서 차두리를 데려온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 A조에서 2승1무1패로 이란(3승1무)과 우즈베키스탄(3승1패)에 이은 3위로 밀려났다. 최종예선에서 각 조 1·2위는 월드컵 본선에 직행할 수 있지만, 3위는 대륙 간 플레이오프를 거치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이라는 꿈이 무너질 수 있다.

형편없는 성적보다 뼈아픈 것은 슈틸리케 감독의 ‘설화’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란전에서 패배한 직후 “소리아와 같은 골잡이가 없었다”는 실언을 쏟아내 선수들의 신뢰를 잃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자신을 향한 갑작스러운 비판에 예민해져 오해의 발언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문화에서는 감독이 사죄하고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는 게 중요하지만, 서구에선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다보니 누구 탓이나 핑계를 대는 것으로 보인 것 같다”고 애써 두둔했지만 거센 경질설을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11월 15일 안방에서 열릴 우즈베키스탄전까지 패배할 경우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협회는 슈틸리케 감독이 언어와 문화 차이로 선수들의 오해를 사고 있다는 판단 아래 해결사로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차두리를 해결사로 낙점한 것으로 보인다.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차두리는 독일어가 유창할 뿐만 아니라 지난해 호주 아시안컵을 슈틸리케 감독과 함께 치른 경험이 있다”며 “또 대표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해줄 인물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5년 3월 3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뉴질랜드의 대표팀 평가전을 대표팀 은퇴경기로 치른 차두리가 교체되어 경기장을 나오며 슈틸리케 감독과 포옹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2015년 3월 3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뉴질랜드의 대표팀 평가전을 대표팀 은퇴경기로 치른 차두리가 교체되어 경기장을 나오며 슈틸리케 감독과 포옹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선수들 자신감 되찾는 게 중요하다”

차두리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차두리는 “많은 분들이 내가 축구로 얼마나 도움을 줄지 걱정할 것”이라며 “지도자로는 처음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조금 다르다. 지금은 전력 분석이나 전술이 아닌 선수들이 자신감을 되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불과 넉 달 전만 해도 아시아 최강을 자랑했던 한국 축구가 흔들린 것이 실력이 아닌 결속력의 실종이라는 점에서 차두리 특유의 친화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차두리는 “이란전 이후 슈틸리케 감독이 겪고 있는 일을 난 (차범근 전 감독의) 아들로서 1998년(프랑스월드컵)에 겪었다. 한때 대통령까지 시켜야 한다고 했다가 경기에 패배하니 나라에 죄를 지은 사람이 됐다”고 떠올리며 “축구감독의 인생이란 이렇게 힘든 것이다. 이젠 내가 슈틸리케 감독을 옆에서 돕겠다”고 말했다. 이어 “감독님의 발언과 선수들의 받아들이는 자세에 밸런스가 맞지 않고 있다. 양쪽을 도우면서 선수들이 마음 편히 경기를 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다만, 차두리는 자신의 합류로 생긴 변화가 외부에 드러나는 것은 경계하고 있다. 대표팀 내부의 일이 낱낱이 드러날수록 하나의 팀으로 되는 길이 지난해 오직 성적만으로 평가를 받기를 원했다.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 반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11월 15일 우즈베키스탄과의 5차전이 바로 그 무대다. 차두리는 “감독이 잘못했든, 선수가 잘못했든 문제는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며 “우리의 목표는 승리다. 그렇게 월드컵 본선이 열릴 러시아에서 2년 전인 브라질과는 다른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자 감독님과 후배들, 그리고 팬들이 바라는 길일 것”이라고 말했다.

<황민국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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