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지존 다툴 현 최강자 ‘휴직서’ 제출로 바둑 한국호 흔들
![[바둑]한국기원·이세돌 ‘화합의 묘수’ 없나](https://img.khan.co.kr/newsmaker/830/64_a.jpg)
세계 바둑의 바다를 순항하던 한국 바둑 호가 위기를 맞았다. 침몰은 아니더라도, 암초에 걸려 꼼짝없이 발이 묶일 위기쯤은 된다.
좌초 위기에 빠진 한국 바둑
한국 호는 그동안 조훈현-유창혁-이창호로 이어지는 최고 성능의 엔진을 단 덕에 쾌속항진을 거듭해왔다. 바둑의 발상지 중국과 현대바둑의 종주국 일본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바둑=한국’의 등식을 세계에 알려왔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바둑 꿈나무들이 한국 호 승선을 바라며 속속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그러나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 호의 항진 속도가 최근 2~3년 새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사이 구리와 쿵제 등 신형 엔진을 장착한 중국 호가 무섭게 추격해와 어느덧 한국 호 후미까지 바짝 따라붙었다. 이미 추월당했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중국 호의 막강 엔진 구리 9단이 세계 7대 메이저 타이틀 중 5개를 집어삼켰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한국 호의 힘이 이처럼 떨어진 것은 한 세월 갈 듯하던 최강 엔진 이창호의 성능이 예전만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이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5년 이상 한국 호를 세계 최강으로 이끌었으면 이제 지칠 때도 됐다. 그토록 오래 버틴 것이 되레 신기한 일이다.
그가 최근 3~4년 새 세계대회에서 우승의 손맛을 보지 못하는 동안 그나마 한국 호의 체면을 세운 것이 ‘비금도’산 강력 엔진 이세돌이다. 그가 힘을 낸 덕에 아직은 세계 최강의 자리를 중국 호에 내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 호 제1의 엔진이 된 그가 돌연 움직임을 멈추려 하고 있다. 굉음과 함께 널브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대로 엔진이 멈춰버린다면, 거센 황사바람에 직면한 한국 호는 침몰은 아니더라도 좌초 위기를 피할 수 없다.
홀로 울리는 손뼉은 없다
이세돌 9단이 결국 지난 8일 한국기원에 휴직서를 냈다. 휴직 기간은 오는 7월 1일부터 내년 말까지 1년 6개월이다. 지난달 기사회가 자신에게 ‘뭔가 조치를 취하겠다’고 응수타진하자 최강수로 맞받아친 것이다.
이로 인해 지금 한국 바둑계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분위기에 싸여 있다. 기사들 간에 갑론을박이 한창이고, 인터넷 바둑사이트에서는 바둑팬들 사이에 험한 말들이 섞인 댓글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 악화 속에 잔뜩 위축된 바둑계가 더욱 깊고 어두운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도 쏟아진다.
아직 폭탄이 터진 것도 아니고 단지 심지에 불이 붙은 것뿐인데도 이러한데, 만약 진짜로 폭탄이 터지면 어떻게 될지, 눈앞이 캄캄하다.
‘이세돌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인 것은 한국기원이다. 이세돌 9단이 기사총회의 ‘징계결의 투표’에 마음의 상처를 입어 휴직서를 냈지만, 그 논란의 발단은 한국기원이 제공했다.
한국기원은 “모든 프로기사는 한국기원이 주관하는 대회에 출전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 이 9단이 불참해 문제가 된 한국바둑리그와 관련해 한국기원은 그에게 ‘참가 여부를 통보해 달라’고 공문(대국통지서)을 보냈다.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불참해도 좋다는 뜻을 전달한 셈이다.
이후 ‘이 9단이 한국바둑리그에 불참할지 모른다’는 소리가 바둑계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그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이 한국바둑리그에 뛰어들어 한국기원과 조인식을 하는 날에도 기자들 사이에서는 “저러다 이 9단이 리그에 불참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하는 얘기가 오갔다.
![[바둑]한국기원·이세돌 ‘화합의 묘수’ 없나](https://img.khan.co.kr/newsmaker/830/65_a.jpg)
그럼에도 한국기원은 이 9단의 의사는 확인하지 않은 채 이 9단을 신안군팀 소속으로 확정하는가 하면, 다른 리그 일정을 빠르게 진행했다. 그러다 마감 시한 마지막 날 이 9단이 대회 불참을 통보하자 난리가 났다. 선수지명을 다시 해야 하는 등 모든 일정이 뒤죽박죽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신안군팀도 리그 참여를 번복할지 모른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그러면서 이 모든 혼란의 책임이 이 9단에게 향했다. 대국 일정 등이 뒤로 밀리며 혼선이 일자 기사들 사이에서도 이 9단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이 9단에 대한 징계의 불씨가 댕겨졌다.
그러나 한국기원도 억울한 면이 있기는 하다. 이 9단이 휴직을 결심한 직접적인 원인이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바로 기사총회의 공개 투표다. 일종의 친목모임인 기사회는 상벌권한이 없다. 그것은 한국기원 이사회의 고유 권한이다. 그럼에도 기사회는 임시총회까지 열어가며 징계(총회에서는 ‘어떤 조치’로 얘기됐지만)를 운운하고, 마치 인민재판을 하듯이 공개투표에 부쳤다. 징계 결정보다 선행해야 할 소명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얼마 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어느 선배 기사와 관련해서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지 않았고, 징계 논의 등은 기사회의 몫이 아니다”라고 말하던 사람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이 9단에게는 날선 비난을 쏟아냈다. 투표 결과의 가부를 떠나 그 과정 자체가 이 9단에게 인간적으로 큰 상처를 줬다. 더욱이 86 대 37로 ‘어떤 조치를 내려야 한다’는 쪽에 힘이 실렸다.
이사회의 징계 결정이라면 저항이라도 해보겠지만, 동료와 선후배에게 버림받았다는 배신감(?)은 그에게 ‘휴직’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다. 이는 이 9단의 ‘술친구’들에게서 들은 얘기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의 시작점이 된 기사회의 ‘모종의 조치’ 결정은 원점에서 다시 논의돼야 한다. 그 전에 한국기원의 불합리한 규정과 제도부터 바로잡는 게 먼저다. ‘참가 여부를 언제까지 통보해달라’고 공문을 보낸 뒤 그날보다 일찍 대국 일정을 잡아놓고는 시합에 나오지 않는다고 문제를 삼는다면, 그것은 초등학생도 웃을 일이기 때문이다.
상벌권한이 없는 기사회가 징계를 들먹인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것은 한국기원 최고의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대한 월권이고 압력이었다.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사회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 이 9단이 아니라 이사회와 바둑팬에게 사과해야 한다.
이 9단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9단 스스로 ‘폭탄’인 것이 문제다. 개인적 성향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이 9단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바둑인’의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사회적 통념으로 통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이 9단은 종종 손사래를 쳤다.
![[바둑]한국기원·이세돌 ‘화합의 묘수’ 없나](https://img.khan.co.kr/newsmaker/830/66_a.jpg)
이 9단의 행사 불참이나 사인 거부 등 돌출행동으로 한국기원 관계자와 선배 기사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윗사람들에게 면박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9단은 ‘내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지’ 하겠지만, 다음해에도 대회를 유치해야 하는 한국기원 직원이나 다른 관계자 등은 불쾌해하는 스폰서들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 거절, 공식석상에서 사회자의 인터뷰 요청 거절, 팬들의 사인 요청 거절 등도 바둑이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라면 본인이 휴직하기 전에 구단에서 방출의 구실로 삼을 만한 행동이다.
동료와 선후배가 해서는 안 될 공개투표를 한 것을 두고 화만 낼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의 잘못은 없었나 반성부터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가장 문제가 된 한국바둑리그 불참과 관련해서 이 9단은 파장을 최소화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고향팀 신안군이 자신을 지명선수로 뽑았다는 기사까지 나갔는데도 가만히 있다가 며칠 뒤, 그것도 마감 시한마저 몇 시간 넘긴 뒤에야 불참을 공식으로 밝힌 것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보다. 나쁘게 생각하면 일부러 골탕먹이려 한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때 행마가 좀 더 명확했다면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치료할 시간은 충분하다
한국기원 이사회는 ‘징계’와 관련해 얘기조차 꺼내지 않고 있다. 이 9단 역시 휴직서를 내기는 했지만, 진짜 휴직에 들어가기까지는 10여 일 남았다. 서로 상처를 치료할 시간은 있는 셈이다.
서로 잘못했으니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양비론이 아니다. 한국기원과 이세돌 9단은 모두 한국 바둑의 보배와 같으니 둘이 힘을 합치라는 소리다.
누가 뭐라 해도 한국기원은 20년 가까이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킨 한국 바둑을 이끌어왔다. 그사이 이렇다 할 사고도 없었다. 우리나라 문화계나 스포츠계에서 바둑만큼 조용한 동네가 없다. 신문과 방송에 그 흔한 비판 기사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행정을 잘 이끈 이들을 무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시샘밖에 안 된다. 작은 실수는 있었지만, 한국기원은 어느 단체보다 유능한 조직이다.
이 9단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 한국 호에서 최대 마력을 자랑하는 특급 엔진이다. 국내 1인자로서 중국 호 최강 엔진인 구리 9단과 세계 지존 자리를 놓고 다툴 유일한 대항마다.
이창호 9단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힘이 빠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영훈 9단과 최철한 9단은 뭔가 2% 부족하다. 신예 강동윤 9단과 박정환 3단 등은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기름칠이 덜 돼 있다. 최고 동력을 내뿜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한국 바둑의 세계 최강 자리를 지켜낼 유일한 버팀목은 이세돌 9단이다. 그의 공백은 한국 바둑의 재앙이다. 한국 바둑이 세계 최강국의 면모를 잃는 순간, 한국 바둑은 기나긴 침체의 늪에 빠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바둑팬들은 그의 이름이 없는 대진표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스폰서들도 마찬가지다. 도전기로 치르는 국수전이 ‘국수’ 없이 파행으로 치러지는 것 또한 참담한 일이다.
이를 막으려면 한국 바둑의 두 중심인 한국기원과 이세돌 9단이 손을 잡아야 한다. 명분을 위해 한국 바둑의 최고 어른이 나설 필요도 있다. 그렇지 않고 지켜만 보다가 때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만 남는다.
<스포츠칸·엄민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