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보복' 소설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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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일 오후 12시 30분, 일본 남부 나가사키(長崎)현 사세보(佐世保)시 오쿠보 초등학교의 연구실에서 이 학교 6학년 미타라이 사토미(12)가 바닥에 많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것을 담임선생이 발견, 119에 신고했다. 경찰과 함께 현장에 도착한 구급대원들은 누군가에 의해 목 오른쪽 동맥이 잘려나간 사토미가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담임선생은 한 동급생 소녀가(11) 점심시간 사토미를 불러 데리고 갔으며 수분 뒤 피투성이인 채로 교실에 돌아와, 연구실로 달려가보니 입구에 사토미가 엎어져 있었다고 상황을 전했다.

사건 뒤 울며 "내 피가 아니다"는 말만 되풀이 했던 가해 소녀는 이후 경찰조사에서 자신이 현장에 떨어져 있던 길이 10㎝ 가량의 연필깎이칼(커터나이프)로 사토미를 죽였다고 자백했다. 부검 결과 사인은 과다출혈로 나타났고 소녀는 이날 저녁 사세보시 아동상담소로 넘겨졌다.

사건 정황  사건이 발생한 오쿠보 초등학교는 사세보시 중심가에서 약 1㎞ 떨어진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다. 6학년 교실과 같은 3층에 위치한 연구실은 학생들이 평소 자유롭게 출입하는 곳이었다. 이 학교는 학년별로 30명 남짓한 정원의 1개 학급만 있는 비교적 작은 규모로 6학년 학생도 38명에 불과했다.

목숨을 잃은 사토미양은 2002년 4월 이 학교로 전학온 것으로 알려졌다. 동급생들에 따르면 사토미와 문제의 소녀도 평소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사토미가 〈마이니치신문〉 지국장인 아버지를 도와 가사를 돌보기 위해 학교 농구부를 그만둔 올 봄까지 두 소녀는 함께 서클활동을 하기도 했다. 시 교육위는 두 소녀가 인터넷 채팅도 자주했다고 전했다. 또다른 동급생 부모들은 "(사토미는)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하고 부모의 가삿일도 적극적으로 도와 친구들로부터 존경받는 아이였다"며 "솔직하고 좋은 아이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학교 역시 아이들이 적어 단합도 잘되고 이지메도 없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며 이번 사건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사건 동기  사건 초기, 살해 동기에 대해 입을 다물었던 소녀는 이틀 뒤인 6월 3일 처음으로 "지난 5월 중순쯤부터 (사토미가) 아주 싫어졌다"고 말문을 떼었다. 사토미와 또다른 소녀를 포함, 친구 3명은 평소 서로의 홈페이지 글을 남기고 채팅을 즐겼는데 5월 중순 사토미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용모를 비하하는 발언을 올려 격분했다는 것이다. 소녀는 아동보호소 직원에게 "내 헤어스타일 등을 화제로 삼아 그만두라고 말했다. 그 전까지는 좋은 사이였다"고 진술했다. 아이들 사이에 흔히 있는 사소한 말다툼이 살인사건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사춘기 소녀들은 감정기복이 심하다는 점 ▲요즘 아이들은 살인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실제 의미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 ▲오쿠보 초등학교처럼 소집단의 경우 아이들의 관계가 훼손되면 회복이 어렵다는 점 등을 사건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터넷과 살인소설 영향  반면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은 인터넷과 살인소설 등이 이번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지적했다. 자기소개서에서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썼고 아이들 사이에서 유별난 독서가로 소문났던 가해 소녀는 평소 〈베틀로얄〉 같은 소설을 탐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베틀로얄〉은 아이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내용을 담아 학부모단체 등의 반대시위로 화제가 됐던 소설로 2000년 영화화돼 일본에서만 1백80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은 블록버스터다. 〈마이니치신문〉은 소녀가 인터넷에 올린 글의 제목도 '베틀로얄-속삭임'이었다며 소년 18명과 소녀 20명이 서로 죽이다 결국 한 소녀가 고독하게 살아남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도했다.

소녀는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너 지금 무슨 헛소리하는 거야"라는 글을 남겼는가 하면 "걔(동급생)들은 비열하고 멍청한 인간들이야. 나는 학교가 너무 지겹고 지루하다"며 학교와 친구들에 대한 증오심을 감추지 않았다.

경찰은 소녀가 사토미를 살해하기 며칠 전부터 죽이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집에서 연필깎이칼을 소지한 채 등교해 일을 벌인 것이라고 밝혔다. 또 살인을 저지르기 전 천으로 사토미의 눈을 가리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자신의 손으로 사토미의 눈을 가린 채 칼로 목을 찌를 만큼 잔인함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나가사키 경찰은 "경동맥을 자른 점에서 살의(殺意)를 엿볼 수 있다"는 소견서을 냈다.

일본 사회 재발 방지 부심  소녀는 6월 3일 추가심문을 하기 위해 현지 검찰에 넘겨졌지만 일본 사회는 이같은 사건의 재발 가능성과 가해 학생의 갱생 및 선도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에 골치를 앓고 있다.

일본에서는 초등학생이 관련된 살인사건만 해도 1989년 9월, 초등학교 1년생(8-여)이 이웃집의 생후 1개월 된 남아를 세탁기에 넣어 숨지게 한 사건 이후 다섯번째다. 피해자가 중태에 이르는 초등학생 관련 폭행사건은 거의 해마다 일어나는 실정이다. 특히 나가사키 사건은 초등학생에 의한 첫번째 교내 살인사건이고 가해자가 남학생이 아니라 여학생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1998년 구로이소시에서 발생한 중학교 1학년생의 여교사 살해사건 이후 교내 흉기 반입 금지 방안을 제출했지만 이번 사건은 흉기가 연필깎기용 칼이었다는 점에 난감해하고 있다. 지난해 나가사키시의 한 중학생이 유치원생을 살해한 사건 이후 서둘러 마련됐던 각종 보완대책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는 점도 문부과학성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사건 이후 일본 법무성은 14세 미만의 아동범죄에 관한 관련법 개정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첫째, 14세 미만 범죄 사건에 대해서도 경찰이 조사권을 갖고 증거를 확보하며 둘째, 소년원 입원 대상연령을 14세 미만으로 낮추고 셋째, 보호관찰 기간 중 규칙위반행위 시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6월 2일 보도했다. 

형사피의자라 해도 14세 미만에 대해서는 형사책임을 면해주고, 아동상담소와 가정재판소의 심리-결정을 거쳐 아동자립지원시설 등지에서 보호처분하는 현행 법규에 비해 한층 강화된 조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법무부 내부에서조차 "초등학생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것은 무리이며 갱생교육도 효과적인 노하우가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실정이다. 법무부의 아동범죄법 개정안은 이르면 2005년 의회에 상정될 예정이다.

이상연〈국제부 기자〉 lsy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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