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 평화봉사단 이야기

(6)40여 년 만에 찾은 한국 “나 일하던 곳 어디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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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 평화봉사단 마지막 단장 제임스 메이어씨가 미국의 해외원조 총괄 기관인 ACTION에 보낸 제안서 표지 /제임스 메이어 단장 제공

주한 미 평화봉사단 마지막 단장 제임스 메이어씨가 미국의 해외원조 총괄 기관인 ACTION에 보낸 제안서 표지 /제임스 메이어 단장 제공

1961년 존 F. 케네디가 창설한 미 평화봉사단(The Peace Corps)은 약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국 최고의 봉사활동기구로 건재하다. 평화봉사단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봉사단원을 훈련해 해외로 파견 중이다. 1961년부터 2023년 5월까지 누적한 기록을 살펴보면 약 24만명의 봉사단원을 143개국에 파견했다. 코로나19 여파로 2020년 이후 평화봉사단원의 해외 파견 규모가 감소했지만 지금도 현재 53개국에서 1400여명의 봉사단원이 활동하고 있다. 내년에 다시 5000여명으로 단원 수를 늘릴 예정이다.

한때 평화봉사단을 초청했다가 프로그램을 종료한 국가는 80개국에 이른다. 대한민국 역시 80개국 중 하나다. 평화봉사단 프로그램을 종료한 사유는 국가마다 제각각이지만, 한국의 경우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기술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국가가 됐기 때문이다. 미 평화봉사단 본부도 아시아의 신흥공업국 중 하나로 1970년대 후반 중진국에 들어선 한국에 대한 지원은 시급한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더 낙후한 국가를 지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8년 평화봉사단 본부는 한국에서 점진적으로 평화봉사단을 철수하기로 했다. 완전 철수 시기는 1982년을 목표로 했다.

15년간 비약적 발전1981년 9월 공식 철수

1981년 1월 출범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행정부의 해외 원조 긴축 결정과 맞물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은 1982년이 아닌 1981년 9월 공식 종료됐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을 파견했던 1966년부터 1981년까지의 15년간 한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른 산업화와 도시화로 한국의 모습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었다. 1966년에 한국에 파견돼 봉사활동을 했던 단원들의 경험과 1980년에 한국에 파견돼 봉사활동을 했던 단원들의 경험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초창기 봉사단원들이 재래식 화장실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길을 오가는 소달구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면 1970년대 후반에 파견된 봉사단원들은 서울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고, 트윈폴리오나 양희은의 포크송을 들으러 생맥줏집에 드나들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먼 지방으로 여행을 갈 수도 있었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1960년대 중반의 한국과 1970년대 후반의 한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2023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단 행사에 참여한 제임스 메이어 단장 /서나래 제공

2023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단 행사에 참여한 제임스 메이어 단장 /서나래 제공

그럼에도 마지막 주한 미 평화봉사단 단장으로 파견된 제임스 메이어(James E. H. Mayer)는 평화봉사단 본부와 견해를 달리했다. 아직까지 평화봉사단이 한국의 농촌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며, 한국에서 계획했던 사업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도 그는 평화봉사단이 좀더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나마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서울은 선진국 도시의 외양을 갖춘 듯했지만, 농어촌의 사회기반 시설은 여전히 낙후돼 있었다. 메이어 단장은 도농격차를 줄이려면 공중보건, 특히 결핵과 같은 감염병 예방과 모자보건 정책에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50쪽에 달하는 제안서를 작성해서 미국의 해외 원조기관을 총괄하는 기관인 액션(ACTION)으로 발송했다. 그 제안서를 통해 본부의 결정을 번복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본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1981년 9월 텅 빈 주한 미 평화봉사단 서울사무실을 끝으로 한국에 남아 있던 평화봉사단의 물리적 공간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추억 어린 교육회관 ‘향수병에 특효약’

1966년 9월부터 1981년 9월까지 주한 미 평화봉사단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에 있던 대한교육연합회 회관 7층 전체를 서울사무실로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1966년 준공된 이 건물을 교육회관이라고 불렀다. 교육회관은 새문안교회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당시 엘리베이터를 갖춘 10층짜리 건물이 흔치 않아 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됐다. 지금도 이 건물은 정우빌딩이라는 이름으로 건재하고 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교육회관 7층은 특히 추억이 깃든 공간이다. 자신이 근무하는 시골 마을까지 도착하기 어려운 까닭에 단원들은 서울사무소 주소로 국제우편물을 받기도 했다. 교육회관에서는 미국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전보나 국제전화를 받을 수도 있었다. 평화봉사단 소식지 ‘여보세요’의 편집부 역시 교육회관 7층에 있었다. 편집부 소속 단원들은 틈나는 대로 그곳에서 투고된 원고를 검토하고 소식지를 만들었다. 서울사무소에 달린 작은 도서실에는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영미 서적들이 구비돼 있었다. 봉사단원들은 서울에 올라오면 우선 교육회관 7층 도서실에 들러서 필요한 책을 빌렸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서울사무실이 있었던 구 교육회관 건물 /Daum 로드뷰 캡처

주한 미 평화봉사단 서울사무실이 있었던 구 교육회관 건물 /Daum 로드뷰 캡처

향수병이 걸린 봉사단원들의 발길이 무작정 향하는 곳도 교육회관이었다. 한국의 농어촌 생활이 낯설고 힘들어한 단원들은 종종 향수병에 걸렸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서울사무실은 이들을 교육회관으로 불러들였다. 덕분에 이곳은 공공연한 ‘만남의 광장’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 생활의 낯섦을 토로하는 차원을 넘어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며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울먹이는 단원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평화봉사단 서울사무실은 특효약을 처방했다. 그렇다고 뭐 그리 대단한 약제는 아니었다. 밥심으로 살아가는 한국인들처럼 미국인들에게도 향수병을 누그러뜨리는 특효약은 교육회관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미국 대사관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었다. 낯설고 불편한 시골에서 근무하느라 고생한 단원들, 미국 음식이 너무나 그리웠던 단원들은 눈물과 콧물을 펑펑 쏟아가며 미 대사관 카페테리아에서 감격의 고향음식을 먹었다. 당시 미국 대사관 카페테리아는 뷔페식이었는데, 고향을 떠나 평화봉사단으로 낯선 땅에 온 20대 청춘들은 시쳇말로 배가 터질 때까지 빵과 수프와 고기를 먹었다. 미 대사관 직원들은 허겁지겁 식사하는 젊은 평화봉사단원들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고 한다. 향수병으로 고생하던 단원들도 이곳만 다녀가면 빵빵해진 배와 더불어 서러웠던 기분이 누그러지고 다시 한국에서 일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 단장인 메이어의 최종 임무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 활동의 깔끔한 마무리였다. 메이어씨는 봉사활동을 지속하고 싶어한 단원들을 네팔, 필리핀 등 다른 나라의 평화봉사단으로 이첩했다. 서울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행정직원들도 미국 대사관, 캐나다 대사관, 한미교육위원단 등의 직장으로 이직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작성해줬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철수하면서 TESOL(영어교수법) 프로그램과 보건 프로그램은 함께 막을 내렸다. 보건 프로그램의 경우,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담당하던 인력을 한국인 보건 요원이 이어받았다. 종료된 중등학교 원어민 영어 교사 프로그램은 한동안 재개되지 못하다가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철수한 지 11년이 지난 1992년, 미국의 풀브라이트 영어 보조 교사 프로그램(the Fulbright Korea English Teaching Assistant Program)이 물려받았다. 한국 경험을 희망하는 미국의 대졸자들은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한국의 농어촌 지역 중등학교에서 1년간 영어 보조 교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풀브라이트 코리아’라고 알려진 한미교육위원단(Korea-American Educational Commission)에서 관여했다. 미국인 사이에서 풀브라이트 영어 보조 교사 프로그램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최근에는 한류의 인기 덕분에 경쟁률이 더 치솟는 중이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원어민 영어 교사 프로그램을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 완벽히 대체하면서 평화봉사단은 한국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적어도 2008년까지는 그랬다.

봉사단원들 다시 초청한 유일한 나라

2008년 한국국제교류재단이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수행한 미 평화봉사단 및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이제는 선진국이 돼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국가적인 보답 행사에 나선 셈이었다. 평화봉사단이 철수한 80개국 가운데 가장 잘 사는 나라가 한국이며 유일하게 봉사단원을 다시 초청하는 나라가 됐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 활동에 관여했던 단원이 2000여명에 이르기 때문에 한 번에 봉사단원을 모두 초청할 수는 없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2008년부터 지금까지 순차적으로 한국 방문을 희망하는 봉사단원과 가족을 초청한다. 행사는 매년 10월 일주일에서 열흘간의 일정으로 열린다.

2023년 미국 평화봉사단 재방한 초청 사업 행사가 지난 10월 22일(일)부터 10월 28일(토)까지 7일간 진행됐다. 재방한단으로 한국에 오는 평화봉사단원과 동행인은 왕복항공권과 일주일간의 숙박, 여행 경비 일체를 지원받는다. 이 행사를 가까이에서 직접 참관할 기회를 얻었다. 첫째 날, 오리엔테이션이 열렸다. 봉사단원이라 해도 15년간 2000여명이나 파견됐기 때문에 같은 기수이거나 같은 지역에서 근무하지 않으면 서로 전혀 알지 못한다. 한국의 재방한 초청사업에 참여해 처음 알게 된 사이도 꽤 많다. 이들은 자기소개 시간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둘째 날 오전엔 그동안 한국이 이룬 경제 발전과 교육 발전을 주제로 연사를 초청해 특강을 들었다. 필자도 연사로 참여해 그동안 연구해온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현황과 역사 및 의미 등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오후에는 이들과 함께 청와대를 비롯한 서울 시내에 들러 관광하는 시간을 가졌다. 셋째 날엔 특수학교인 한국우진학교와 장애인 복지시설인 임마누엘 하우스를 견학했다. 이들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 출신 친목단체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 명의로 기부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2023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단 행사에 참여해 강의 중인 필자의 모습 /서나래 제공

2023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단 행사에 참여해 강의 중인 필자의 모습 /서나래 제공

근무지·하숙집 찾아가니 ‘상전벽해’

넷째 날과 다섯째 날이 하이라이트였다. 봉사단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망의 본인 근무지 방문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0대 청춘 시절을 보낸 학교나 보건소는 지금 얼마나 어떻게 변했을까. K-51 보건 요원이었던 폴라 스트레인지(Paula J. Strange)는 40여 년 만에 본인이 근무했던 군위군 보건소를 찾았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군위에서 결핵 요원으로 일했던 그는 딸과 함께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예전과 전혀 딴판으로 변한 보건소 건물을 보면서 그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1970년 낙후한 제주도 어촌 마을에서 근무했던 한 단원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한 제주도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고, 충남 대덕군의 한 보건소에서 근무한 단원은 이제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연구단지로 변모한 동네를 가리키며, “내가 도대체 어디서 근무했던 말인가”라며 큰 소리로 묻기도 했다. 1박2일이라는 짧은 일정 안에 근무지를 돌아보고 하숙집 가족들과 동료들까지 만나야 한다는 점에서 많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40~50년 만에 가장 강렬하고도 뜨겁던 추억의 한 페이지를 들춰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에게는 엄청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40여 년 만에 군위군 보건소를 찾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 폴라 스트레인지와 그의 딸, 그리고 군위군 보건소 공무원들 /군위군청 제공

40여 년 만에 군위군 보건소를 찾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 폴라 스트레인지와 그의 딸, 그리고 군위군 보건소 공무원들 /군위군청 제공

한국은 분명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대부분의 단원이 자신이 살던 집, 일하던 직장의 위치를 쉽사리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수소문 끝에 어렵게 찾아낸 옛 하숙집 가족들과 직장 동료들과 밥상에 둘러앉아 숟가락을 드는 순간, 그때 그 시절이 어제인 듯 되살아나는 듯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까닭에 작고한 가족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지었고, 쉽게 나오지 않는 한국어 실력을 탓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여섯째 날은 한국국제협력단인 코이카(KOICA)에 방문해 한국이 다른 국가를 대상으로 벌이는 개발협력 현황과 과제들을 확인했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이 철수한 지 10년이 지난 1991년부터 한국의 코이카는 봉사단원을 선발해 개발도상국에 파견 중이다.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이 과거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한국의 코이카 단원들은 지금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한국어와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이를 접한 평화봉사단원들은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2023년 10월 27일 열린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단 행사의 공식 만찬주로 그 시절 추억을 샘솟게 하는 막걸리가 등장했다. 서나래 제공

2023년 10월 27일 열린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단 행사의 공식 만찬주로 그 시절 추억을 샘솟게 하는 막걸리가 등장했다. 서나래 제공

‘눈물 젖은 두만강’ 열창한 노년의 미국인들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 저녁,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로 송별 만찬이 열렸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뿐만 아니라 평화봉사단의 한국어 강사들까지 모두 함께하는 자리였다. 이들은 한강의 새빛섬 레스토랑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저녁식사를 했다. 한국어 강사들은 매년 이 행사에 참여해 본인이 가르쳤던 제자들을 만난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던 전보배씨는 “40년 만에 제자를 만났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송별만찬의 백미는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들의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1973~1975년에 활동을 한 단원이 무대에 올라 방진오라는 한국어 이름으로 본인을 소개하더니 ‘눈물 젖은 두만강’과 ‘갑돌이와 갑순이’를 열창하던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 시절 외웠던 노래를 지금껏 잊지 않고 다시 부르다니. 더 재미난 건 젊은 세대 한국인들은 정작 이 노래들을 몰라서 따라부르지도 못하는데, 노년의 미국인들은 신이 나서 이른바 ‘떼창’을 했다는 점이다. 2023년 주한 미 평화봉사단 재방한 초청사업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젊은 날을 한국에서 보낸 봉사단원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더불어 그들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한다.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로 열린 재방한단 송별 만찬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서나래 제공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로 열린 재방한단 송별 만찬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서나래 제공

역대 미 평화봉사단원의 페이스북 그룹에는 일주일이 멀다고 부고가 올라온다. 주한 미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파견된 단원들은 현재 대부분 60대 중반~80대 초반이다. 재방한 초청사업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봉사단원의 수 역시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장거리 비행을 견딜 수 있는 건강한 단원들만이 한국에 다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재방한 초청사업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해를 거듭할수록 이 행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서나래 한국교원대학교 한국근대교육사연구센터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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