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해도 방류” 체념…일본 민주주의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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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 AP연합뉴스

일본 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 AP연합뉴스

일본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를 하루 앞둔 지난 8월 23일 현지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시마를 찾았다. 일본 정부가 전날 오염수 방류 일정을 기습 발표한 뒤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에서는 반대 여론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후쿠시마의 분위기는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후쿠시마 도심에는 오염수 방류와 관련된 플래카드 하나 보이지 않았고, 시민들 또한 오염수 방류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침묵이 ‘찬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정부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체념에 가까운 침묵이었다. 방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절차는 생략됐다. 어민들의 동의도 끝까지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의 결정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자민당의 독주를 막을 야당의 힘은 지리멸렬했고, 여당은 각종 프로파간다를 동원해 여론을 바꿔나갔다.

일각에서는 오염수 방류 결정 방식이 일본 민주주의 위기를 드러냈다고 우려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면 미디어가 홍보하고 결국 여론이 움직이는 방식이 일본에선 마치 하나의 공식처럼 굳어져 가고 있었다.

반응 없는 정부…반대를 포기한 시민들

후쿠시마 도심에서 만난 시민들은 정부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특히 후쿠시마의 젊은이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을 표현했다. 후쿠시마에서 나고 자란 사토 도오루(35)는 “어차피 반대하더라도 정부는 방류를 강행했을 것”이라며 “우리가 뭐를 해도 정부는 반응도 없고 변화도 보이지 않아왔다”고 체념 섞인 반응을 보였다.

오염수 방류로 생계에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어민과 상인들은 그러나 정부의 기습 방류 결정에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후쿠시마에서 식재료 도매업을 하고 있는 콘노 도시유키는 “정부가 방류하겠다고 예고를 해왔지만, 갑작스럽게 이틀 전에 일정을 발표한 것에 사실 쇼크를 받았다”면서 “하지만 후쿠시마 사람들은 원전 문제에 대해 입 밖에 잘 꺼내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을 ‘비(非)국민’으로 몰아가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는 쉽게 나누지 않는다는 하소연이었다.

후쿠시마대 전·현직 교수들이 지역민들의 의견을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결성한 ‘후쿠시마 원탁회의’ 사무국장인 하야시 군페이 후쿠시마대 교수는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원전 사고 이후 10년 넘게 고통을 받은 주민들은 정부·도쿄전력과 싸우기엔 너무 지쳐버린 상태”라고 전했다. 또 “‘오염수 방류가 위험하다’는 말을 꺼내면 불안해지는 심리가 더 커진다고 생각해 반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며 “일부 주민들은 정부 없이 복구는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정부 프로파간다가 여론을 바꿨다”

일본 정부는 대대적인 캠페인으로 여론을 움직였다. 2021년 4월 해양 방류 방침을 결정한 이후 일본 정부는 ‘오염수 안전 홍보’에 주력했다. 정부의 오염수 안심 캠페인은 신문, 방송 등 미디어는 물론 전국 학교에서도 이뤄졌다. TV·신문 광고는 끊임없이 “알프스(ALPS·다핵종제거설비)를 거친 오염수는 안전하다”는 내용을 되풀이했고, ‘오염수’ 대신 ‘처리수’를 공식용어로 사용했다.

정부의 프로파간다는 여론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아사히신문이 2020년 11~12월 전국 유권자 212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 방안에 대해 55%의 응답자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한다는 응답률은 32%에 그쳤다. 그러나 정부가 오염수 안심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하자 찬반이 비등해졌다. 현재는 아예 찬성이 압도적이다. 현지 공영방송 NHK가 지난 9월 8~10일 전국 18세 이상 시민 1236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오염수 해양 방류 대응에 대해 ‘타당하다’가 66%, ‘타당하지 않다’가 17%로 집계됐다.

후쿠시마에서 만난 지역 저널리스트 마키우치 쇼헤이는 주요 매체들이 오염수의 영향과 앞으로 생길 문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대신,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내용만 전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시다 후미오 정권이 오염수 안심 캠페인에 쏟아부은 돈과 항목을 일일이 조사한 결과 유력매체인 요미우리신문도 지난해 2억5000만엔(22억7000만원)을 받고 오염수 안심 관련 사업을 전개한 사실을 찾아냈다며 “오염수 안심 캠페인 사업을 벌이고 있는 신문사가 오염수의 위험성을 파헤칠 가능성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전쟁 가능 국가 만들기 나설 것”

우려도 일본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주민 3824명과 함께 원전 피해 소송을 이끌었던 나카지마 다카시 소송 단장은 “기시다 총리가 지난 8월 21일 일본 전체 어민을 대표하는 전국어업협동조합연합회(전어련)의 사카모토 마사노부 회장 등을 만났을 때 ‘몇십 년이 걸려도 책임지겠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 ‘방류하겠다’는 말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면서 “전어련이 끝까지 반대 입장을 전달했는데, 바로 다음날 방류를 발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적 단계를 모두 무시한 기시다 정부는 ‘소프트’한 독재 형태를 보이고 있다”며 “이를 방관하면 ‘하드’한 독재로 나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마키우치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오염수 방류 강행에 성공한 자민당이 같은 방식으로 ‘전쟁 가능 국가 만들기’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지난 6월 의회에서 통과된 ‘방위장비품 생산 기반법’의 계획서에는 ‘방위산업의 매력화’ 항목이 포함돼 있다. 마키우치는 “말 그대로 전쟁산업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대다수의 일본 국민은 전쟁을 반대하지만, 정부가 ‘후쿠시마를 부흥시켜야 한다’고 했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전쟁은 국가를 위해 좋은 것’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건다면 오염수 방류 사태와 마찬가지 결론으로 귀결될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일본 정부의 오염수 방류 후폭풍 대응 방식에 전체주의 악몽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앞서 오염수 방류 이후 중국이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를 강화하자, 우파는 ‘일본 생선을 먹고 중국을 이기자’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논픽션 작가 하야카와 타다노리는 “중국의 이해를 얻지 못한 외교적 실책을 ‘피해를 본 불쌍한 일본’으로 바꿔치기하고, 중국을 이기겠다는 말로 배외주의와 국가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윤정 국제부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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