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부와 의회, 싱크탱크 관계자들까지 길고 넉넉한 휴가를 즐기는 미국 수도 워싱턴 정가의 여름은 대체로 평온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백악관의 차기 주인을 결정하는 2024년 대선 레이스를 앞둔 올여름은 다를 것 같다. 모든 것이 ‘표’로 귀결되는 선거의 계절이 왔기 때문이다.
재선에 도전하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통령(80)은 미국 각지를 돌며 사실상의 선거 유세를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역대 최고령’이라는 나이가 주는 약점과 정체 상태의 지지도를 극복해야만 2년 뒤에도 백악관에 머물 수 있게 된다.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77)은 미 역사상 초유의 기소 사태에도 거침없는 행보를 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현재까지는 공화당 주자들 가운데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법 리스크가 그의 주장대로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트럼프의 대안을 꿈꾸며 공화당 경선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이 존재감을 각인시킬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11명 후보 난립’ 공화당 대선 경선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5월 대선 도전을 선언했다. 현직 대통령의 연임 시도인 만큼 갑작스러운 이변이 없는 한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로 확정될 전망이다. 케네디 가문의 일원인 환경변호사 출신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69), 자기계발서 작가 메리앤 윌리엄슨(70)이 민주당 후보로 나섰고, 진보성향 학자 코넬 웨스트 유니언신학대 교수(70)는 소수정당인 인민당 소속으로 대선에 도전 중이다.
세간의 관심은 공화당 대선 경선에 쏠리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중간선거가 끝나자마자 일찌감치 출마를 선언한 이후 지난 6월 29일(현지시간)까지 공식 출마 선언을 한 공화당 후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포함해 모두 11명이다.
지금까지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독주가 뚜렷하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여론조사 평균치를 토대로 분석한 최근 결과를 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51.9%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44)의 지지율인 21.1%보다 무려 30.8%포인트나 높은 수치다. 트럼프-디샌티스 2강 구도라고 하기에는 1위와 2위의 격차가 매우 벌어져 있다.
다른 후보들의 지지율은 겨우 한 자릿수대에 그치고 있다.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64)이 5.8%, 최연소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를 지낸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51)가 3.8%, 공화당의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인 팀 스콧 상원의원(57)이 3.6%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60)는 2.3%, 비벡 라마스와미 전 로이반트 사이언스 최고경영자(CEO·37)는 2.0%의 지지율을 기록 중이어서 이대로라면 오는 8월 23일 밀워키에서 열리는 공화당 첫 후보 토론에 겨우 ‘턱걸이’할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 전국위원회는 후보 토론 참석 요건으로 지지율 1% 이상, 후원자 최소 4만명 확보 등을 내걸었다.
‘트럼프 대세론’ 속 변수 남아
이처럼 전직 부통령과 스타 주지사, 공화당 거물 정치인까지 대선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이름값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공화당 유권자들 사이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누리는 막강한 영향력을 재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트럼프의 확고한 지지세를 모르지 않을 공화당 주자들이 그럼에도 출마를 결심한 이유는 뭘까. 가장 유력한 해석으로는 이들이 다음 대선이 치러지는 2024년이 아닌 2028년 이후를 내다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해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더라도 4년 후에는 다시 대선을 치러야 한다. 군소 후보들로서는 부족한 인지도를 높이고, 전국 단위 정치인으로 몸집을 키우기에 조기 경선 출마만큼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도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공화당 내에선 이미 대선후보와 짝을 이루는 부통령 후보인 러닝메이트 지명을 노리고 소리 없는 경쟁에 돌입했다는 시각도 있다. 흑인이자 당내 신망이 두터운 편인 스콧 상원의원, 인도계 여성 이민자인 헤일리 전 대사 등이 공화당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지지층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카드로 꼽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성추문 입막음 의혹에 이어 기밀문서 유출 관련 혐의로 처음으로 연방검찰에 의해 기소돼 연방법원에 출석한 역대 첫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쌓여가는 악재에도 그의 열성 지지층은 오히려 결집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여기에 공화당 경선판이 북적이면서 표가 분산되면 궁극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반사이익을 보리라는 관측마저 제기된다. 다만 경선과 맞물려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판이 경선 판세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결국 ‘바이든-트럼프’ 리턴매치?
트럼프 전 대통령의 독주가 계속되는 현재 시점에서는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대결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020년에 이어 4년 만에 전·현직 대통령이 다시 맞붙는 셈이다.
양당 지지자들을 포함해 미국 유권자들은 둘의 리턴매치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NBC방송 여론조사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하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이 각각 70%와 60%로 나타났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고령(취임 시 바이든 82세·트럼프 78세)을 제외하면 삶의 궤적부터 정책 노선, 스타일까지 모든 면에서 ‘극과 극’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양자 대결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 우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50개 주 가운데 6~7개의 경합주가 판세를 좌우하는 미 대선 구조상 이번에도 경합주에서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벌써 선거 이후의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선거캠프 경험이 풍부한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트럼프가 2020년 대선 결과를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선거와 그 이후의 과정이 평화롭게 마무리될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