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침체 벗어나려 새 비전 제시… 한국과는 갈등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67)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난 7월 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그의 가족과 일본인뿐 아니라 세계의 손실”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미국 내 모든 공공기관과 해외 미군기지에 사흘 동안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인도와 대만 공공기관도 조기를 게양했다.
한국에서 아베 전 총리는 흔히 극우 정치인 내지 일본 극우 세력의 핵심 인물로 여겨진다. 국제사회의 평가는 다르다. 아베 전 총리의 부고를 전하는 서구권 외신 기사 대부분은 “일본 전시 역사에 대한 모호한 태도와 안보에 대한 강경한 자세로 한국과의 갈등을 초래했다”(워싱턴포스트)고 짚으면서도 그를 ‘극우’로 여기는 경우는 많지 않다. “트럼프와 같은 민족주의자는 아니었으나 극우 세력의 사랑을 받았다”(시애틀타임스)는 정도로 표현한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은 “아베 전 총리는 여성과 민주주의의 옹호자”라고 논평했다.
아베 전 총리는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장기침체에 허덕이던 일본에 ‘아름다운 나라’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기조인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의 개념을 제시한 이도 아베 전 총리다. 궁극적으로 ‘전후(戰後) 일본’을 벗어난 새로운 일본을 추구했다.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한일 위안부 합의를 추진한 것도 ‘탈전후’를 위한 시도였다. 일본의 ‘탈전후’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평가의 차이를 불렀다.
한일 위안부 합의 추진
아베 전 총리가 구상하는 ‘탈전후’ 일본의 모습은 2006년 고이즈미 내각 관방장관이던 시절 출간한 책 <아름다운 나라로>에 잘 드러나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책에서 현대 일본의 정치체제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일본에서는 ‘종전’이라고 표현) 이후 연합국 최고사령부 총사령부(GHQ)가 강제한 평화헌법 체제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전후 체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진정한 일본의 모습, 즉 ‘아름다운 일본’의 모습을 돌려놓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름다운 일본’의 핵심은 복고주의다. 일본의 자연과 전통, 문화를 아름다운 것으로 전제하고, 과거사 문제로 비판받고 위축된 일본을 전쟁 이전으로 돌려놓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일본이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군사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돼서 패전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영미식 신자유주의 대신 일본식 공동체주의를 되살린다는 어감도 있었다.
‘아름다운 일본’이라는 구상의 뿌리는 그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1896~1987)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시는 도조 히데키 전시 내각의 상공대신(경제산업부 장관)으로 패전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으나 기소되지 않고 풀려났다. 1957년 총리에 취임한 그는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추진했다. “극동에 대한 평화 및 안전 유지를 위해 미군이 유사시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한다”는 조항이 문제가 됐다. 좌파는 평화헌법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우파는 미국에 종속된다는 이유로 반발했다. 개정 안보조약은 1960년 통과됐지만 기시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는 ‘기지국가’가 됐으며, 이는 평화헌법 체제의 근본적 모순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달리 말하면 평화헌법 개정의 길을 열어놓은 셈이다.
1960~1970년대 일본은 고도성장을 이루며 평화가 번영의 바탕이라는 사고가 확산됐다. ‘일본’이나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다. 기시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이 경험이 아베 전 총리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기시는 외손자인 아베 전 총리를 무척 귀여워했으며 아베 전 총리 역시 할아버지를 잘 따랐다고 전해진다.
2006년 출범한 ‘1기 아베 내각’은 이듬해 선거 참패로 무너졌다. 성급하게 개헌 등 이념적 문제를 밀어붙인 게 패인의 하나로 지목됐다. 아베 전 총리는 2012년 9월 다시 자민당 총재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중의원 선거 승리로 다시 총리가 됐다. 아베 전 총리는 1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나라’의 이상을 구현하려면 경제를 부흥시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본이 패전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인 만큼 주변국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돌아가려는 아름다운 과거’는 일본 내에서 1960년대 고도성장기로 받아들여졌다. 해외에서는 군부가 폭주한 1930년대가 아닌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영국, 미국과 군축조약을 체결하고 국제사회에 참여했던 1920년대 일본과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동아시아 질서 재편 구상
이 같은 구상을 2기 아베 내각의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에 골고루 반영했다. 아베노믹스, 2020 도쿄올림픽 유치, 미일동맹 강화, 2015년 종전 70주년 담화, 한일 위안부 합의 등으로 나타났다. 아베 전 총리는 외교 분야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 문제를 논의했고, 센카쿠열도 분쟁을 벌였던 중국과도 관계개선을 이뤄냈다. ‘한일 위안부 합의’도 위안부 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극우의 반발을 누르고 추진했다. 영토문제와 과거사 문제 등 ‘전후’ 유산들을 하나하나씩 정리하려는 시도였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 새로운 외교정책 기조로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발표했다. 아베 전 총리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에 대응해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개념을 미국에 제안했다. 일본이 중국의 견제에 동참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군사적 부담을 나눠지겠다는 내용이었다. 동남아시아에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로 지역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 같은 노력은 쿼드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창설로 이어졌다. 일본은 국제질서를 결정하는 나라의 반열로 나아갔다.
아베 전 총리가 구상하는 ‘아름다운 일본’의 아킬레스건은 과거사였다. 정부 간 한일 위안부 합의가 타결됐지만, 일본이 과거사를 망각하지 않기를 원하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과거사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거부하면서 합의는 도리어 양국 갈등의 요인으로 변했다. 사회의 자유 수준도 후퇴했다. 세계 10~20위권이었던 일본의 언론자유지수가 아베 2기 내각을 거치며 70위 수준으로 떨어졌다. 정부가 언론사의 취재에 불응하고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방식으로 후쿠시마 원전이나 방위 정책 비판에 재갈을 물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베 집권기 일본의 그늘이었다.
고이즈미 집권 시절 추진한 ‘비정규직 정책’은 아베노믹스의 발목을 잡았다. 무제한 양적완화와 마이너스 금리, 엔화 약세 등에 힘입어 일본 기업 실적은 개선됐지만 임금 인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안정된 생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베 전 총리를 숨지게 한 야마가미 데쓰야(41)는 어머니의 종교활동으로 가족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뒤 ‘파견 노동자’ 생활을 전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7월 12일 아베 전 총리의 장례식을 보러온 일부 시민이 운구 차량을 향해 고개를 숙이거나 “아베씨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포착됐다. 빛과 그늘이 교차하지만 일본의 시각에서만 보면 지난 30년 동안 그처럼 일본과 동아시아 질서에 큰 영향을 끼친 정치인은 없었다. 아베 전 총리의 그림자가 사후에도 일본사회에 한동안 짙게 드리울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다.
<박은하 국제부 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