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문가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공산주의가 붕괴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미국이 완성한 역사를 허물려는 악의 국가를 멸해야 한다. 그 자리에 민주국가를 세우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를 일종의 신의 계시처럼 받아들여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아프간)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아프간의 탈레반은 1400년 전 선지자의 시대처럼 살기를 원했다. 교육은 여성에게 음란한 자유를 주는 불신앙적 정책이며, 이슬람국가를 멸망으로 이끈다고 봤다. 선거제도는 샤리아(이슬람 율법)와 양립할 수 없으므로 없앴다. 이단이라고 보는 시아파의 소수민족 하자라를 대상으로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카불공항의 혼돈은 세상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며 정치를 해온 이들이 만든 결과라는 분석이 있다. 중동 전문가인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아프리카연구부장)는 “미국의 아프간 철수로 정복주의 세계관에 기반을 둔 민주국가 건설 프로젝트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이 명백해졌다”고 말했다. 지난 8월 25일 서울 서초구 국립외교원 연구실에서 인남식 교수를 만나 미국의 아프간 철수 이후의 중동정세를 물었다.
-아프간은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의 무대였다. 지금도 지정학적 중요성이 있나.
“맥락은 달라졌다. 19세기 지정학적 게임이 벌어졌을 땐 따뜻한 남쪽 바다를 향하려는 제정러시아가 세력을 뻗치려 했고, 해양세력을 대표하는 영국이 이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러시아가 아프간과 파키스탄 쪽으로 내려오면 인도가 위험해지고, 제국의 핵심이익이 침해된다고 생각해 힌두쿠시산맥 쪽에서 막아선 것이 그레이트 게임이다. 20세기엔 비슷한 맥락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노리는 소련의 남진을 막는 ‘컨테인먼트(봉쇄) 전략’의 차원에서 개입이 이뤄졌다. 냉전 종식 이후 지정학적 가치는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았다. 지역 패권을 위한 교두보로서가 아니라 테러리즘이라는 새로운 위험을 통제하는 차원에서 주목했다. 그대로 둘 경우 미국 본토가 위기에 노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동해 지난 20년간 미국 역사상 최장의 전쟁을 펼쳤다.”
-미국이 아프간에 머물 유인은 이제 없는가.
“아프간전쟁으로 2442명의 미군이 죽고, 2조2600억달러(약 2700조원)의 전비가 들었다. 50만명에 가까운 미군, 동맹군, 정부군이 8만명의 탈레반을 못 없앴다. 더 주둔한다고 과연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애초 2001년 10월 7일 시작된 전쟁의 목적은 알카에다 거점 해체와 오사마 빈 라덴 같은 핵심인사의 검속이었다. 이 모든 게 다 해소됐다고 본다면 바이든으로선 전쟁을 더 끌고 갈 이유가 없었다.”
-탈레반을 축출한 것으로 전쟁을 끝냈어야 했나.
“바이든도, 오바마, 트럼프도 마찬가지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만 소위 ‘민주평화론’이라는 이론에 기대 세상을 민주주의로 다 심어놓아야만 전쟁을 완전히 종식할 수 있다는 다소 이상주의적 가치를 추구했다.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정권교체로 민주주의를 심겠다고 한 건 과도한 욕심이었다. 치고 빠져야 했는데 치고 눌러앉는 바람에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을 20년 가까이 지속했다.”
-네오콘(신보수주의)의 국가건설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인가.
“네오콘은 굉장히 이상적인 세계관을 가졌다. 자기들이 역사를 완성했다는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저서 <역사의 종말>을 통해 나타났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의 시장경제를 꽃피워 우리가 역사를 완성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완성된 역사에 도전하는 세력들이 있고, 그 독성이 9·11로 표출됐다. 미국이 해야 할 일은 9·11의 주범만 처벌하는 게 아니라 미국이 완성한 역사를 허물어뜨리려고 하는 불순세력을 다 없애야 한다는 공세적 현실주의를 가졌다. 필요하다면 선제공격을 해서라도 악의 축을 비롯한 불량국가들의 레짐(정권)을 바꾸는 게 목적이었다. 지나고 보니 압도적인 미국의 국력과 화력으로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국가 하나 건설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미국 시민 입장에서는 간단하다. 이라크전에서 4497명이 죽고, 1조2000억달러를 썼다. 아프가니스탄에선 더 많은 병사가 죽었다. 그런데 달라진 게 뭐냐. 오히려 이슬람국가(ISIS)가 창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희생을 감수해야 하냐, 이런 인식이 오바마 정부에선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라는 아시아 재균형의 형태로 나타났다. 트럼프 정부에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다소 구호는 멋지지만 ‘미국은 다 빠지겠다’는 고립주의로 나타났다. 바이든은 말을 앞세우지 않고 그냥 빼버렸다.”
-오바마도 문제를 인식했다면, 왜 철군 대신 증파를 선택했나.
“먼저 펜타곤을 중심으로 한 군산복합체의 주요 세력은 전쟁을 끝내기보다 유지하는 걸 선호했다. 펜타곤의 여론을 압도하면서 철군을 하면 패전을 자기가 결정하게 된다. 그 책임을 지기 싫어했다는 해설이 있다. 오바마가 병력을 뺐다면, 지금도 바이든이 잘못했다고 비판하는 공화당이나 의회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미국이 워낙 압도적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원이 많지 않은 나라였다면 2~3년 전쟁하면 고갈돼 나와야 하지만 미국의 역설은 너무 부자 나라라는 것이다. 돈이 많이 들어도 전쟁을 유지할 능력이 되면서 독특한 딜레마에 빠졌다.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 지지 않는 전쟁으로 바꾼 것이 지금까지의 패턴이었고 이번에도 그랬다.”
-바이든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
“너무 성급하게 철군을 진행했다. 철군 시한을 못 박았을 때 민간의 필수요원은 다 빠졌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도 미국의 대외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 직원이 다수 남아 있다. 아프간의 지방에 들어가 재건을 위해 20년간 노력한 이들이다. 펜타곤과 백악관에선 이들부터 철수하는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이들을 카불로 모아놓지도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제일 늦게 빠져야 할 군이 바그람에서 야반도주하듯 빠졌다. 2020년 2월 29일 카타르 도하에서 탈레반 대표단과 평화회담을 할 때 미국은 철군을 약속하면서 전제 조건을 걸었다. 알카에다 같은 테러조직과 절연해야 한다. 무기를 내려놓고 정치회담을 통해 아프간 내 다양한 정파와 연대할 정도의 포용적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등이었다. 탈레반은 미국의 철군을 지지하고,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어차피 합의됐으니 연말까지 시간을 더 두는 게 맞았다. 하지만 바이든은 9·11 20주기가 돌아오기 전 철군해 20년 넘게 끌고 가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상징성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상황을 면밀히 파악해 계획을 짜기보다 시간에 쫓기게 됐다. 물론 이렇게 빨리 카불이 함락될 줄 몰랐고, 이렇게 정부군이 무능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거의 1000조원 가까이 쏟아부어 정부군 역량을 강화했는데 수도 하나 한달을 못 지킨다는 건 설사 정보당국이 예측했다고 해도, 보고서에 솔직히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보 실패이지만 자기가 결정하고 옳다고 믿는 바를 자기 책임 하에 끝내겠다고 공언하면서 실제로 결단을 한 것은 오바마나 트럼프 때 보지 못한, 어쩌면 미국 대통령의 가장 전통적인 모습에 근접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탈레반이 개방적·포용적 정부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킬까.
“낙관론과 비관론이 있다. 낙관론에서 보면 1996에서 2001년까지 아프간을 통치했던 탈레반의 입장에서는 그때 왜 허망하게 정권을 잃었는지 복기할 것이다. ‘이번에는 좀 다르게 가자. 5년이 아니라 영구히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자’라고 생각한다면 옛날처럼 총을 들이대고 이념 통치를 할 시대는 아니다. 탈레반 축출 이후 태어나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속에서 자란 20대들, 소위 MZ세대 경우 반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20년 전의 무도한 세력이 돌아와 여성이 학교를 못 다니게 하면, ‘무슨 이런 나쁜 놈들이 다 있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탈레반 입장에서는 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두 번째, 90억달러(10조5000억원) 정도의 자금이 동결된 상태이다. 국가 운영자금을 만들어야 하는 탈레반 입장에서는 얼마나 아쉽겠나. 없으면 마약이라도 팔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까라는 관측이다. 카타르에서 여러차례 회담이 열렸는데 탈레반의 경우 수많은 서방 외교관을 만나면서 세상이 변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게 낙관론적 접근이다. 비관론에서 보면 원리주의 정부를 지향하는 탈레반의 경우 (그들이) 달라졌다면 변한 근거를 쿠란에서 제시해야 한다. 여성의 교육을 금지했던 과거의 입장을 바꾼다면 ‘우린 쿠란을 이렇게 새롭게 해석하게 됐다’는 식으로 소위 법적 배경을 밝히는 ‘파트와’를 내려야 하는데 전혀 그런 말이 없다. 그런 점에서 기만전술일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탈레반은 20년간 미국과 나토 등 세계 최강대국과 싸워 결국 축출한 승리자가 됐다. 재미있는 건 소셜미디어에 익숙해 사상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입장이 강한 일반적인 10~30대와 달리, 탈레반에 가담한 10~20대는 훨씬 더 과격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총을 잡고 싸워 20대가 되자 미국을 쫓아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자신감에 과도한 행동을 보일 수 있다. 세 번째, 국가 운영을 위한 해외 원조와 차관이 필요해 서방에 투항하는 대신, 중국과 파키스탄 같은 대안세력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난 약간 비관론에 가깝다. 달라진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세상을 안심시킨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립’을 세게 잡고 반대파를 숙청할 가능성이 있다.”
-9·11 20주기까지가 고비가 될 수 있겠다.
“8월 31일까지 1만명이 넘는 사람을 내보내 아프간 영토에 미국인이 하나도 없게 만든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려하는 것 중의 하나는 알카에다 프라임(AQP)이다. 파키스탄 접경지에 주로 있던 이들은 많을 때 2000~3000명 수준이었다가 최근에 수십명대로 떨어졌다. 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미국은 조직이 와해됐다며 승전보를 울렸지만 이들은 평화협정으로 대부분 풀려났고, 탈레반 지방조직에 흩어져 싸움의 기술을 전수했을 것이다. 소위 이슬람국가 호라산(ISK)이라는 아프가니스탄 기반의 이슬람국가(ISIS) 분파 일부도 탈레반 조직에 잠입했다. 탈레반이 공식적으로 우린 알카에다나 ISIS와 절연했다고 선언해도 이들이 신분을 세탁해 탈레반에 가담하면 누가 이들을 잡아낼 수 있겠는가. 카불이 무슨 합의를 하든 상황을 악화시켜 카불을 제2의 ISIS 거점으로 만들려 할 것이다. 칸다하르의 탈레반 분파인 하카니 네트워크도 통제 못 한다. 지난해 2월 미국과 합의했을 때도 이들은 끝까지 반대했다. 리더십이 약속을 했으니 8월 31일까지는 지켜보지만, 그 이후로는 미국인을 향해 총을 들 것이다. 그럼 최악의 상황이 된다. 이렇게 되면 미국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 바이든 입장에선 10월 중간선거는 끝나는 것이다.”
-미국의 중국 봉쇄 전략과 연결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을 아프간이라는 수렁에 빠뜨리겠다는 목표를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아프간에 내전이 일어날 경우 접경국가인 중국의 부담이 제일 클 것이다. 중국은 탈레반이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 들어가 분리주의 운동을 선동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미국이 빠지면서 주변 나라들이 돈과 사람, 외교를 투입해야 한다. 하필 주변국들이 다 미국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라면, 철수가 나쁘지 않은 카드가 된다. 중국 견제에 올인하기 위해 과감하게 철군을 했을 수 있다.”
-중국의 전략은.
“그간 해왔던 행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정간섭에 반대하고, 정부가 어떻게 꾸려지든 그건 아프간의 몫이라고 남겨놓을 것이다. 중국은 항상 경제 이익에는 굉장히 민감하고 빠르게 움직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중동과 서남아시아, 특히 이슬람권에 개입하지 않았다. 미국이 헤매는 걸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아프간과는 비록 짧지만 와칸 회랑에서 76㎞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곳이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다. 누구라도 좋으니 아프간을 안정화할 정당성 있는 정부가 들어서길 바랄 텐데 그렇다고 탈레반을 지지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고민이 클 것이다. 탈레반이 무도한 짓을 하며 돌아다닐 때 세상 천하의 나쁜 국가를 지원한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경제적으로 개입하되, 정치적으로는 가능하면 거리를 둘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서남아시아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파트너는 파키스탄이다. 거의 동맹국에 가까운 수준이다. 탈레반의 복귀에는 파키스탄 파슈툰족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중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을 통제하는 계획을 갖고 있을 것이다. 직접 발을 디디진 않을 것이다.”
-이란이 어떤 대응을 할지 궁금하다.
“탈레반은 테헤란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란이 추종하는 시아파는 단순히 종파가 다른 게 아니라 이교도이자 멸절돼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는 다양한 부족 네트워크가 있어서 이들이 이란 동부와 아프간을 오가며 탈레반에게 집권 후 공존하자는 테헤란의 메시지를 계속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본적으로 다리어와 파슈토어 모두 페르시아 계열이다. 종파적으로 상극에 있지만 부족 네트워크를 통해 적대적으로 돌아서지 않을 수 있는 포석을 할 것이다. 탈레반을 견제한다는 측면에서 이란과 미국이 공동의 이익을 갖고 있어 핵협상에 속도가 붙을 것이다. 미·이란 핵협상이 실패해 제재가 유지될 경우 이 라인이 전부 친중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바이든은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란과의 핵 합의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
-아프간을 정상국가로 이끌 방안은.
“과거 탈레반을 합법 정부로 인정한 나라는 지구상에 딱 세 나라밖에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파키스탄인데 사우디아라비아가 관건이다. 사우디의 실질적 통치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의 관심사는 안정적으로 왕권을 승계하는 것이고, 여기에 미국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바이든이 등장하자마자 카슈끄지 암살사건을 두고 정면 공격하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사과했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사우디를 압박해 사우디로 하여금 탈레반의 정통성을 허물게 할 수 있다. 1년에 한 번 있는 메카와 메디나 성지순례의 비자 쿼터를 주지 않는 것이 한 방법이다. 이슬람의 종주국을 자임하는 사우디로부터 성지순례라는 무슬림의 5대 의무 중 하나를 이행할 수 없는 이단의 집단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요구하는 조건에 맞춰 자신들의 뉘앙스를 변화시켜야 한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