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멕시코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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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이 아닌 포옹을.” 2018년 12월 취임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이하 ‘AMLO’) 멕시코 대통령이 범죄율을 낮추고 평화를 가져오겠다며 내건 표어다. 하지만 멕시코의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6월 6일(현지시간) 치러진 총선과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인 96명이 피살돼 ‘피로 물든 선거’가 됐다. 이름의 약자를 따 AMLO로 불리는 대통령 지지율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약 60%의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여당 국가재건운동(MORENA·모레나)은 약 50석을 잃으며 국정 동력이 약해졌다.

멕시코 총선과 지방선거가 치러진 다음 날인 6월 7일(현지시간) 멕시코 중부 아과스칼리엔테스의 한 개표소에서 개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아과스칼리엔테스|신화연합뉴스

멕시코 총선과 지방선거가 치러진 다음 날인 6월 7일(현지시간) 멕시코 중부 아과스칼리엔테스의 한 개표소에서 개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아과스칼리엔테스|신화연합뉴스

힘 잃어가는 AMLO 대통령

이번 선거에서는 연방 하원의원 500명과 주지사·시장, 주의원 수천명을 뽑았다. 임기 6년의 AMLO 대통령의 중간평가 성격의 선거이기도 했다. 모레나는 현재 253석으로 단독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국가선거관리위원회(INE) 표본 개표결과 하원 190∼203석을 가져갈 것으로 전망됐다. 기존엔 연합 정당 의석을 합치면 개헌 가능선인 전체의 3분의 2도 넘겼는데, 이번 선거에서 이를 유지하는 것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연합 정당인 노동자당, 녹색당의 의석을 합치면 265∼292석으로 하원 전체 의석 500석의 절반은 넘겼지만, 개헌에 필요한 의석은 채우지 못한 것이다.

임기 전반 AMLO 대통령은 여당의 상·하원 장악에 힘입어 개혁정책을 거침없이 추진해왔다. 멕시코 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와 특권 등을 없애겠다며 사회 프로그램과 교육, 빈곤과의 싸움 등 여러 개혁정책을 펼쳤다. 그는 자신의 개혁정책을 19세기 멕시코 독립전쟁과 개혁전쟁,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에 이은 ‘4차 변혁(4T)’으로 지칭하고 있다. 특히 멕시코의 에너지 부문을 국가 통제권 아래 두려던 AMLO 대통령의 계획은 이번 선거에서 의석을 잃으며 동력이 약해졌다.

여당이 힘을 잃은 것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경기악화 등이 이유지만, 멕시코 고질병으로 꼽히는 폭력과 치안 문제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멕시코 국민의 3분의 2는 치안 개선을 위한 정부의 대응에 비판적이다. 페데리코 에스테베즈 멕시코 자치기술연구소 교수는 “2년 반 동안 코로나19 등 참담한 일이 벌어졌던 AMLO 대통령에게 이번 선거결과는 상당한 손실”이라면서도 “다만 예산 절차 등을 진행하기 위한 의석은 확보했다”고 말했다.

이전 선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멕시코 선거에서도 후보들이 잇따라 살해되는 잔혹사가 반복됐다. 컨설팅사 에틀렉트에 따르면 지난해 9월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정치인 96명이 피살됐다. 그중 후보자로 등록한 정치인만 34명에 달한다. 정치인들에게 가해진 살해 협박을 비롯해 살해, 상해, 납치·감금, 가족 등에 대한 공격, 재물손괴 등을 모두 포함한 범죄는 총 782건이다. 2018년 선거 때의 774건보다 늘어났다. 에틀렉트는 2000년 이후 치러진 선거 중 가장 폭력으로 물든 선거라고 전했다.

멕시코 총선과 지방선거가 치러진 다음 날인 6월 7일(현지시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멕시코시티|로이터연합뉴스

멕시코 총선과 지방선거가 치러진 다음 날인 6월 7일(현지시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멕시코시티|로이터연합뉴스

특히 이번 선거를 앞두고 지난해부터 후보자들의 잇따른 피살사건이 불거져온 가운데, 선거 당일 공포와 위협은 최고조에 달했다. 무장 세력의 위협을 받고 투표를 조기 마감한 주도 있었다.

지난달엔 북서부 소노라주 소도시에서 시장 후보로 나섰던 아벨 무리에타 전 주검찰총장이 괴한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지난 3월엔 남부 오악사카주 소도시 시장선거에 야당 연합 후보로 출마하려던 여성 정치인 이본 가예고스가 괴한의 피습으로 숨졌다. 모두 현직 시장에 도전하는 경쟁 후보들이었다. 선거운동 전단을 돌리던 한 후보가 대낮에 버젓이 피살당하고, 여성 정치인이 납치되기도 했다. 후보자의 집 앞에 시체가 배달되는 등 정치인을 압박하거나 협박하는 일도 흔했다. 선거 당일 투표소에서 시신 2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정치인 96명 피살… 피로 얼룩진 선거

5월 21일(현지시간) 멕시코 치와와주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주의회 선거 후보로 나선 줄리에타 카스티요의 자택 앞에 시체처럼 보이는 소포가 도착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현장 감식을 벌이고 있다. 이 소포에는 카스티요를 협박하는 메시지도 함께 들어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 시우다드 후아레스|EPA연합뉴스

5월 21일(현지시간) 멕시코 치와와주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주의회 선거 후보로 나선 줄리에타 카스티요의 자택 앞에 시체처럼 보이는 소포가 도착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현장 감식을 벌이고 있다. 이 소포에는 카스티요를 협박하는 메시지도 함께 들어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 시우다드 후아레스|EPA연합뉴스

문제는 정치인들이 살해돼도 용의자가 붙잡혀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이다. 체포한 용의자가 청부살해범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지역 유명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건 범죄조직들이 정권을 잡은 지역 정치인과 손잡고 경쟁자들을 숙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치전문가 기예르모 트레호는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범죄조직들은 마약밀매 루트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다툼에서 생존하기 위해 지방 정부와 지역 경제, 주민, 영토를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고 말했다.

정치인이 곧 범죄자인 경우도 많다. 미국 마약단속국이 수배 중인 인물이 버젓이 출마한 경우도 있다. 에텔렉트 대표 루벤 살라자르는 “지역 범죄조직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공직에 출마할 수 없다”면서 “정권을 장악한 정치인과 범죄조직에 대항하면 협박·살해당하는 것이 멕시코식 민주주의”라고 비판했다.

멕시코는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살인율이 높은 도시 1~6위를 싹쓸이할 만큼 치안이 불안하다. AMLO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총이 아닌 포옹을” 표어를 내걸고 멕시코 범죄율을 낮추겠다고 약속했지만,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대대적인 범죄 소탕 작전 대신 우범지역 젊은이들에게 일자리와 장학금을 제공해 범죄조직에 가담하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려 했지만 효과가 거의 없었다.

현 정부가 이전 정권들보다 덜 강경한 범죄대책을 고수하면서 범죄조직들이 더 활개를 친다는 비판도 나온다. 2019년부터 올 1월까지 멕시코 주재 미국대사를 지냈던 크리스토퍼 란다우는 “범죄집단이 멕시코 정부 조직의 35~40%를 장악하고 있다는 추정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너무 방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좌파 트럼프’로도 불리는 AMLO 대통령의 극단적 성향이 정치 양극화를 심화시켜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미 시카고 로욜라대학의 범죄·폭력 전문가인 제마 클롭산타마리아 교수는 “대통령이 평화 약속을 이행하기는커녕 반대파 정치인들을 비판해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폭력 부추기는 정치 양극화

범죄를 제대로 심판하지 않는 사법제도도 문제로 지목된다. 현지 비영리단체 임푸니다드세로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2017년 10월부터 2018년 9월까지 검찰이 기소했지만, 재판에서 처벌을 받은 범죄는 전체의 1.3%에 불과했다. 멕시코 아메리카푸에블라대학 국제정치학장 제라르도 로드리게스는 “살인사건은 제대로 조사되지도 않고, 전문가도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 폭력을 조장하는 사법체계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윤정 국제부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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