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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내외국인 구분 없이 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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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빠르게 백신 승인 방역 낙제국에서 방역 선진국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가파르게 늘어나던 지난해 여름은 정말 두려웠다. 확진돼도 입원은 고사하고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루 수천명씩 확진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국에 가면 확진되더라도 살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국경이 막힌 상태에서 특별기가 언제 뜰지 모르고, 돌아오는 건 더 기약이 없으니 섣불리 삶의 터전을 박차고 떠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리야드의 리야드국제전시장에 마련된 접종소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 본인 제공

사우디아라비아는 리야드의 리야드국제전시장에 마련된 접종소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 본인 제공

지난해 6월에는 하루 확진자가 5000명에 육박했지만, 다행히 계속 줄어들어 1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100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미 식품의약국(FDA)에서 곧 백신을 승인할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 놀랍게도 FDA 자문위원회에서 화이자 백신 승인을 권고한 12월 10일, 사우디 식품의약청은 한발 빠르게 화이자 백신을 승인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12월 17일 보건부 장관이 백신을 맞는 것으로 사우디에서 접종이 시작되었다. 확진자가 36만명에 이르도록 변변히 대응 한번 해보지 못했던 방역 낙제국이 하루아침에 방역 선진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보건부는 백신 사용을 승인하던 날 내외국인 구분 없이 모두 접종 신청을 하라고 요청했다. 우선 기저질환자, 의료관계자, 65세 이상, 비만환자를 대상으로 하고, 이후 50세 이상, 그리고 전체로 확대하겠다고 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내는 해당 나이에 몇달이 모자랐지만, 함께 신청해 승인받았다. 그때 이미 신청자가 40만명을 넘었다고 했고, 접종은 리야드 한곳에서만 하는데 1순위 대상자도 아닌 사람이 일찌감치 승인받은 것이다.

며칠 뒤 왕세자가 백신을 맞았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고 나서 신청자가 다섯 배 늘었다. 그래도 1순위에 들지 않은 이들이 백신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리야드에서만 접종이 이루어진 첫 일주일은 하루 접종자가 1000여명 남짓했고, 세곳으로 늘어난 지금도 3000여명 남짓하니 지금까지 접종받은 사람은 전체 3500만 인구 중 채 2만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2순위 사람들이 접종받는다는 건 결국 많은 사람이 승인을 받고 예약을 망설인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우리에겐 이곳의 모든 행정절차가 느슨해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접종소 입구에서부터 안내가 시작돼 접종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외국인도 비용 하나 내지 않고 QR코드에 신분증만 보여주면 됐다. 놀랍게도 진행요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10여년 전만 해도 여성과 함께 일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나라였고, 여성 운전이 허용된 것도 불과 2년 전 일이다. 게다가 외국인도 차별을 두지 않은 것 또한 낯선 모습이었다. 비록 그것이 방역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기는 해도 말이다.

물 흐르듯 진행되는 절차와 여성에 의해 움직이는 시스템 그리고 외국인을 같은 주민으로 받아들이는 모습. 그동안 가졌던 사우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일거에 털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변화였다.

<박인식 벽산아라비아 법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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