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에 빠진 자국의 민주주의와 국제사회 리더의 위상 회복해야
조 바이든 전 민주당 부통령은 지난 11월 7일(현지시간) 주요 경합 주들의 대선 투표 결과가 사실상 확정된 뒤 승리를 선언하면서 “모든 미국인을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4년간 극으로 치달았던 혐오와 분열의 정치 대신에 국민적 통합을 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 AP 연합뉴스
대선 전날인 2일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새로워질 시간이라며 “어두울 때에만 별이 보인다”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을 인용했다. 대선을 앞둔 시기를 미국 민주주의의 암흑기로 규정한 것이었다. 올해 대선은 역대 최고 사전투표율에서도 알 수 있듯 유권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시민들은 이번 선거를 ‘트럼피즘(트럼프주의) 심판’의 계기로 삼았다. 바이든은 이번 선거를 “미국의 영혼을 놓고 벌이는 전투”에 비유했다.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
이번 미국 대선은 이전과는 분명 달랐다. 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미국에서 대통령 스스로 선거의 공정성을 공격했다. 음모론과 불복 시나리오가 판쳤다. 트럼프 정부의 4년 행보와 대선 캠페인은 세계에 미국 정치의 적나라한 수준을 보여줬다. 미국은 ‘다시 위대하게’ 되기는커녕 국제적 신뢰가 무너지고 웃음거리가 됐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이유에서 올해 미 대선은 세계가 민주주의의 의미와 민주적 절차의 안정성을 되묻게 했다.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 증오와 선동, 편 가르기가 일상화돼 미국사회를 위협한 것 못잖게 국제사회의 룰도 무너졌다. 다자간 협력은 뒷전으로 밀렸고, 욕설과 막말이 외교를 잠식했다. 이 모든 것을 바이든 정부가 ‘정상화’할 수 있을까. 미국을 암흑기에서 민주주의의 회복기로 이끌어갈 수 있을까.
내년에 취임하면 78세 미국 사상 최고령 대통령이 될 바이든은 평생을 정치인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1973년 의회에 진출한 뒤에 30여년간 상원을 지킨 7선 의원이고, 버락 오바마 정부 8년 동안 부통령을 지냈다.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태어났지만 델라웨어에서 자랐고, 길지 않은 변호사 생활을 거쳐 지방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발을 디뎠다. 교통사고로 부인과 어린 딸을 잃은 후 질 제이컵스와 재혼했다. 1988년과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에 도전했다가 실패했고, 부통령을 거쳐 마침내 백악관에 입성하게 됐다.
5년 전 큰아들을 뇌종양으로 잃는 등 개인사로 보면 아픔도 많았지만 정치적 고난은 적었다.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킹 목사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꼽는다. 소탈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이지만 말실수도 잦다. 사업가 출신에 허풍과 거짓말로 유명한 트럼프와는 상극이지만, 세련된 연설과 카리스마로 팬들을 휘어잡는 오바마와도 확연히 다르다. 세계가 다 아는 정치인이지만 그가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가 노령의 정치인을 다시 전면으로 불러냈다.
바이든 시대의 미국과 세계는 분명 트럼프 시대와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당장 맞닥뜨릴 문제는 코로나19다. 방역물자 확보에서 인프라와 건강보험 개혁까지, 의료문제 하나만 봐도 갈 길이 너무 멀다. 당내 대권 경쟁자였던 버니 샌더스와 엘리자베스 워런 등의 정책을 수용하고 민주당 젊은 개혁파 의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국을 ‘조금 더 왼쪽으로’ 끌고 가는 여정은 험난할 것이다. 개혁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트럼프 집권이라는 왜곡된 결과를 부른 사회적 불만을 해소할 수 없다. 포퓰리즘에 대한 심판이 재차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감으로 향하지 않게 하려면 민주당도, 미국 정부도, 시스템도 모두 변해야 하는데 이를 바이든이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지 아직은 물음표가 많다.
트럼프와 차별되는 ‘도덕적 리더십’
외교문제는 바이든의 전문 분야다. 몇몇 언론들은 바이든을 가리켜 아버지 부시 이후에 외교문제를 가장 잘 아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평한다. 바이든은 1997년부터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공화당 정부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민주당의 당론에 반대하는 발언도 거침없이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991년 걸프전에 반대했으나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는 찬성했다.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때는 맨 먼저 무기 금수조치와 군사공격을 주장했지만 2003년 이라크 침공 때는 맨 앞에서 반대했다. 외교정책에 대한 그의 노선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로 분류된다.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 다른 주권국가의 일에 때로는 무력을 써서라도 개입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고도 불린다.
바이든의 그런 입장은 이번 대선에서 내세운 ‘미국이 다시 이끌어야 한다(America Must Lead Again)’는 구호로 요약된다.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주의를 요약한 구호였던 것과 대비된다. 바이든 측이 ‘다시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을 만들기 위해 키워드로 내세운 것은 ‘도덕적 리더십’이다. 클린턴보다는 세계 문제에 관심이 많고, 오바마보다는 개입주의 성격이 강하다는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중국을 견제하고 싶어하지만 미중관계의 틀을 흔들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전통적 우방들과의 관계를 더 강화하고, 국제기구에서 기여도를 높이고, 다자 위기관리 체제를 튼튼히 하고, 인권과 기후변화 등에서 미국의 도덕적 리더십을 강화하는 것이 미국의 위상을 지키는 길이라고 보는 식이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내친 다자주의로 다시 돌아가 기후변화와 팬데믹 등 글로벌 이슈에서 세계의 공동 대응을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막말 싸움과 극한 대립은 피할지 몰라도 바이든 시대의 세계구도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과 군비경쟁, 러시아와의 대립은 계속될 것이다. 하비에르 솔라나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은 프로젝트신디케이트에 올린 글에서 “미국 대선이 가르쳐주는 것은, 한 나라가 글로벌한 도전들을 모두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썼다. 호주 매체 더컨버세이션은 “민주주의를 회복할 미국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미국이 이끌어줄 것이라는 환상’이 깨져나간 것을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환상이 깨져나간 자리에서 미국과 세계는 새 출발을 해야 한다. 가장 무거운 짐을 떠안은 바이든에게 세계의 시선이 쏠린 이유이기도 하다.
<구정은 국제부 선임기자 ttalgi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