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 축구 이어 영화서도 공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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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한증(恐韓症).’ 중국인이 한국 축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단어다. 1978년 12월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중국 축구대표팀이 한국에 0대1로 패한 후 32년간 중국은 A매치에서 한국을 이기지 못했다. 치우미(球迷·축구팬)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공개적으로 “중국의 월드컵 진출, 월드컵 개최, 월드컵 우승이 축구에 대한 세 가지 소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한증이라는 단어에는 14억 인구를 가진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이 못한 월드컵 4강 진출을 해낸 한국에 질투와 경외감, 좌절감이 묻어 있다.

<기생충>은 중국 본토에서는 원제목인 <기생충>으로 부르지만, 대만에서는 <기생상류(寄生上流)>로, 홍콩에서는 <상류기생족(上流寄生族)>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홍콩의 <상류기생족> 개봉 포스터. / AM

<기생충>은 중국 본토에서는 원제목인 <기생충>으로 부르지만, 대만에서는 <기생상류(寄生上流)>로, 홍콩에서는 <상류기생족(上流寄生族)>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홍콩의 <상류기생족> 개봉 포스터. / AM

한국 영화 <기생충>이 비영어권 영화로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받는 등 4관왕을 달성하자 공한증은 영화계로 번질 분위기다. 중국은 10조원에 달하는 거대 박스오피스 시장을 가지고 있고,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인정받는 자국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보니 5000만 인구의 작은 이웃나라 한국이 세계 영화계를 뒤흔들고 있는 데 대해 부러움과 좌절감이 뒤섞여 표출되고 있다.

<기생충> 성과에 놀란 ‘영화 큰 손’ 중국

중국 온라인 매체 <펑파이>는 “<기생충>의 수상 소식은 갑작스러웠지만 이상하고 놀랄 일도 아니다. 한국 영화의 굴기(우뚝 서는 것)는 2∼3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라면서 “중국은 초기에만 해도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삼보(三寶·자동차 사고, 불치병, 기억상실)를 비웃었지만 최근 한국 영화의 강세는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한국 영화가 현실 문제를 파고들면서 관객들의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예로 든 영화는 <소원>·<도가니>·<82년생 김지영>·<감기> 등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사회 문제를 다룬다.

<소원>은 잔혹한 아동 성폭력 조두순 사건을 소재로, <도가니>는 장애인 성폭력 사건인 광주인화학교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에 대해, <감기>는 바이러스 유행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지만, 중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 큰 공감을 얻은 작품들이다.

<펑파이>는 “중국 누리꾼들은 사회적 이슈를 논하면서 한국 영화를 논거로 삼고 있다”면서 “한국 영화 시장의 규모와 인재는 제한적이지만 한국 영화인들은 극도로 민감한 예술적 후각, 현실 생활과 사회 문제의 높은 관심으로 이를 극복한다”고 했다.

1980년대 한국과 중국 영화가 동시에 중흥기를 맞았지만, 한국과 달리 중국은 검열과 스크린 쿼터 등을 유지하면서 두 나라 영화산업에 큰 격차가 벌어졌다는 것이 내부 목소리다. 중국 영화 블로거 위니는 “중국인들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뿐 아니라 한국의 자유로운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를 부러워하고 있다”며 “영화산업의 번영을 이끌 수 있는 것은 바로 건강한 사회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한 영화관 매표소의 모습(사진 위) / 금세계영화관,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의 한 영화관. 코로나19 영향으로 중국의 대부분 영화관이 영업을 중단했다.

중국의 한 영화관 매표소의 모습(사진 위) / 금세계영화관,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의 한 영화관. 코로나19 영향으로 중국의 대부분 영화관이 영업을 중단했다.

대만 <연합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와 빈부격차를 다룬 <기생충>은 한국 배경이지만 능숙한 위트와 유머로 전 세계에 통했다”면서 “이 작품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영화산업이 어떻게 국제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는지 전 세계에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했다.

<기생충>의 중국 본토 판권은 판매된 상태지만 개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생충>이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베이징청년보> 등 주요 관영 매체가 관련 논평을 쓰기도 했다. 2017년 중국 정부가 한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반발로 한한령(限韓領·한류 콘텐츠 금지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여러 경로로 한국 콘텐츠가 소비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올해 농사 망친 중국 영화계

중국 영화산업은 양적으로는 세계 최대 수준까지 팽창했다. 국가영화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영화 박스오피스는 총 642억660만 위안(약 10조9542억원)으로 전년 대비 5.4% 증가했다. 이중 중국산 영화 박스오피스가 시장 점유율 64.07%를 차지한다. 지난해 영화 관람객 수는 총 17억 명을 넘었다. 중국산 애니메이션 영화 <너자(Ne Zha)>가 중국에서 <어벤져스: 엔드게임>(어벤져스 4)의 기록을 깨고 흥행했다. 중국은 자국에서는 메가 히트작을 쏟아내고 있지만, 검열에 따른 소재적 한계,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 때문에 내수용에 그치고 있다.

갈 길은 먼데 코로나19까지 닥치면서 ‘영화계의 시계’는 두 달째 멈췄다. <남방주말>은 “코로나19는 대형 영화사와 배급사, 톱스타뿐 아니라 중소형 제작사와 마케팅 회사, 단역 배우들에 이르는 영화산업의 말초신경까지 강타했다”고 했다.

중국 저장(浙江)성의 헝뎬(橫店)촬영소는 규모가 3000만㎡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 세트장이다. 베이징 자금성을 80% 크기로 재현한 건축물을 비롯해 진시황궁 등 5000년 역사를 아우르는 10여 개의 세트장을 갖췄다. 낮에는 스타를 보고, 밤에는 쇼를 본다는 헝뎬에는 호텔도 50개가 넘는다. 지난해 12월만 해도 200개 스튜디오를 동시에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지만 코로나19로 지난 1월 25일부터 폐쇄됐다.

영화 제작자 허빈(賀斌)은 <남방주말>에 “사전 작업을 거쳐 2월 3일 일본으로 출국해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1월 30일부로 모든 것이 멈췄다”면서 “위약금도 문제지만 앞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배우들의 스케줄 등 통제 불능 요소가 많아지면서 영화 제작이 아예 취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소형 영화 마케팅 회사 대표는 “임금·월세를 고려할 때 6개월간 버틸 수 있는데 이미 두 달이 지났다”고 한숨을 쉬었다. 현재 대부분의 영화관도 폐점이거나 개점 휴점 상태다. 춘제(중국 설) 대목에 개봉될 예정이던 대작 영화도 개봉이 취소됐다. 올해 영화 농사는 망쳤다는 말까지 나온다.

<박은경 베이징 특파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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