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 저널리즘, 거액의 소송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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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들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 회자되는 사건들을 철저한 검증 없이 기사로 내보내면서 이른바 ‘클릭수’를 높이기에 열중하는 현상에 대한 경고도 나온다.

미국 켄터키주 코빙턴 가톨릭고등학교 학생 니콜러스 샌드먼(앞줄 왼쪽)이 1월 18일 워싱턴 링컨 기념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활동가 네이선 필립스가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 유튜브 화면캡처

미국 켄터키주 코빙턴 가톨릭고등학교 학생 니콜러스 샌드먼(앞줄 왼쪽)이 1월 18일 워싱턴 링컨 기념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활동가 네이선 필립스가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 유튜브 화면캡처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선거 구호가 적힌 모자를 쓴 백인 고교생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위협하고 조롱했다는 비판성 기사를 쏟아냈던 미국의 주류언론들이 줄줄이 거액의 명예훼손에 직면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동영상에 기초해 기사가 나간 이후 본인 해명과 추가 공개된 동영상 등을 통해 실제 사건의 맥락이 기사의 내용과 매우 다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법정 공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어느 쪽이 소송에서 유리할지에 대한 갑론을박은 이미 시작됐다. 이번 사건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미국 주류언론의 편향적 시각을 드러냈다는 비판과 함께 충분한 취재 없이 소셜미디어에 의존해 기사를 쓰는 관행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켄터키주 파크힐스에 있는 코빙턴 가톨릭고교 학생 니콜러스 샌드먼(16)은 지난 3월 13일(현지시간) CNN이 자신을 인종주의자라고 왜곡 보도하는 바람에 심각한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2억7500만 달러(약 3110억원)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샌드먼은 앞서 2월 19일 <워싱턴포스트>를 상대로도 2억5000만 달러(약 2830억원)의 소송을 제기했다. 2억5000만 달러는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가 2013년 <워싱턴포스트>를 사들일 때 투입한 금액과 같다.

미국 고교생의 천문학적 액수 손배소

샌드먼 측 명예훼손 전문 변호사 린 우드는 50여곳 이상의 매체와 개인에게도 서한을 보내 법률적 대응을 예고한 상태다. 우드 변호사는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앞으로 소송을 수백 건 제기할 수 있다면서 “학대에 가담한 집단의 규모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CBS 방송의 유명 앵커 댄 래더가 ‘저주받은 자들을 위한 변호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우드 변호사가 이토록 득의양양한 이유는 무얼까?

미국 언론들은 지난 1월 19일 트럼트 대통령의 2016년 대선 구호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문구가 적힌 빨간 모자를 쓴 백인 청소년들이 워싱턴 링컨기념관에서 나이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조롱하고 위협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전날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 올라와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 동영상에 근거한 기사였다. 동영상에는 백인 남학생이 북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늙은 아메리카 원주민 앞에 서서 노려보며 히죽히죽 비웃는 듯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괴성을 지르거나 웃으며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하는 모습도 보였다.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백인 학생들이 늙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위협하고 비웃었다면서 비판했다. 화면에 등장했던 아메리카 인디언 활동가 네이선 필립스(65)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위협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들이 “장벽을 세워라” “트럼프 재선 가자”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기사도 나왔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신원이 이내 밝혀졌고, 비판 수위는 갈수록 높아졌다. 독자들의 반응도 격렬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가 백인 남학생으로 하여금 나이 많은 원주민을 비웃고 위협하게 만들었다며 앞다퉈 개탄했다. 코빙턴 고교가 가톨릭 학교여서 분노는 더 컸다. 학생들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높아졌고 학교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민주당 대선 예비주자들까지 비난 대열에 가세했다.

니콜러스 샌드먼이 1월 23일 미국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튜브 영상이 찍혔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유튜브 화면캡처

니콜러스 샌드먼이 1월 23일 미국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튜브 영상이 찍혔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유튜브 화면캡처

샌드먼은 며칠 뒤 홍보대행사를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워싱턴에서 열린 생명존중 행사 참석차 단체로 워싱턴에 갔고, 낙태 반대 캠페인을 벌인 뒤 돌아오는 길에 역시 단체로 링컨기념관에 들렀는데 다른 집단이 먼저 자신들을 위협했고, 갑자기 필립스가 북을 치며 자신들에게 다가왔다고 밝혔다. 다른 학생들이 외친 것은 학교 구호였고, 갑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에 당황한 자신이 아무 말 없이 서서 웃었던 것은 필립스를 자극하거나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모자’는? 워싱턴에 온 김에 기념품으로 사서 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신원이 공개된 이후 살해 위협 메시지까지 받고 있다면서 결백을 호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샌드먼과 코빙턴 학생들이 초기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부당하게 취급당한 것 같다. 언론에 의해 명예가 훼손된 듯하다”고 올리며 논쟁에 가세했다.

기사와는 너무 달랐던 사실

다른 동영상들이 인터넷에 추가로 공개되면서 논란은 싱거울 정도로 재빨리 정리됐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흑인 기독교단체 회원들이 먼저 백인 학생들을 보고 욕설을 퍼부었고, 그 이후 필립스가 두 집단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어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샌드먼의 해명이 모두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폭스뉴스를 비롯한 친트럼프 성향 매체와 지지자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쌤통’이라며 고소하다는 표정이다. 우드 변호사도 거액의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배경에 ‘반트럼프 매체’의 행태에 경종을 울리려는 의도가 있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3월 1일 ‘편집자 메모’로 입장을 밝혔다. 1월 19일 최초 보도 이후 나온 다른 언론 보도, 당사자 해명, 추가 공개된 동영상, 코빙턴 교구의 자체 조사 등을 통해 최초 기사와 상반되는 내용들이 나왔으며, 이후 내보낸 기사에 이런 사항들을 반영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 자체를 취소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오보’를 시인한 셈이다. 다만 <워싱턴포스트>와 CNN 등은 사실 관계를 충분히 취재하지 않은 채 기사를 내보낸 실수는 있었지만 어떤 편견이나 의도가 작용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워싱턴포스트>와 CNN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설사 16세 소년이 실제로 늙은 원주민을 조롱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쏟아낸 비난은 너무 심했다는 것이다. 마이클 매싱 <콜롬비아 저널리즘 리뷰>의 전 편집장은 <가디언> 기고문에서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가 교묘하게 조장한 증오와 선동, 편가르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저널리스트들은 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언론들이 트럼프를 비판하다가 트럼프를 따라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들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 회자되는 사건들을 철저한 검증 없이 기사로 내보내면서 이른바 ‘클릭수’를 높이기에 열중하는 현상에 대한 경고도 나온다. 소셜미디어에 나도는 사건이 언론에 의해 다시 회자되면서 각종 의미가 부여되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실제 ‘뉴스가치’에 비해 훨씬 중요한 뉴스로 둔갑하는 현상을 보여준 사례라는 것이다. 잡지 <뉴요커>의 편집자 조슈아 로스먼은 어떤 이야기나 이미지가 급속하게 유포되는 ‘바이럴리티’(virality)보다는 사안 그 자체를 보고 뉴스가치를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재중 국제부 기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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