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 없는 아카데미 시상식 잘 진행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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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올 아카데미 시상식에 공식 사회자를 두지 않는다고 지난 4일 밝혔다. 대신 13명의 시상자가 사회자 역할을 나눠 맡는다고 전했다. 유례없는 ‘사회자 구인난’ 때문이다.

미국 최고 권위의 영화상인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30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사회자 없이 진행된다. 유례없는 ‘사회자 구인난’ 때문이다.

영화 <라라랜드>의 제작자 조던 호로위츠(왼쪽)가 2017년 2월 26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에서 열린 8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받았다고 발표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영화 <라라랜드>의 제작자 조던 호로위츠(왼쪽)가 2017년 2월 26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에서 열린 8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받았다고 발표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2월 2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리는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공식 사회자를 두지 않는다고 지난 4일 밝혔다. 대신 13명의 시상자가 사회자 역할을 나눠 맡는다고 전했다.

처음부터 이런 시상식을 계획한 건 아니다. AMPAS는 애초 아프리카계 배우 케빈 하트(39)를 사회자로 낙점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쥬만지: 새로운 세계>로 한국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배우다. 하트는 지난해 12월 4일 인스타그램에 “올해 오스카를 특별하게 만들겠다”며 직접 사회자로 선정됐음을 알렸다.

하트가 사회자로 선정된 것을 두고 ‘다양성을 추구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카데미는 그간 ‘백인 잔치’라고 불릴 정도로 흑인 사회자가 드물었고, 수상 후보들도 백인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트는 순조롭게 91번째 아카데미 사회자가 되는 듯했다.

이틀 만에 산산조각난 기대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수년 전 하트가 내뱉은 성소수자 비하 발언이 문제였다. 스스로 아카데미 사회자가 됐다고 알린 다음날 그의 2011년 트윗이 논란이 됐다. “만약 내 아들이 집에서 딸들과 함께 인형의 집을 갖고 논다면 난 그걸 부수면서 ‘게이나 하는 짓을 그만둬’라고 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누리꾼들은 그가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여러 단어들을 자주 썼다는 점도 찾아냈다. 한 코미디 무대에서 “나의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는 아들이 커서 게이가 되는 것”이라고 발언한 것도 도마 위에 올랐다.

하트는 자신이 동성애 혐오자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비판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사회자 발표가 난 지 이틀 만인 12월 6일, 하트는 트위터에 “많은 재능 있는 예술인들이 축하받아야 할 자리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사회자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과거 발언에 대해서도 사과하며 “내가 원하는 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아카데미와는 훗날 만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코미디언 지미 키멜이 사회를 맡은 2017년과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역대 시청률 최저치를 잇달아 경신한 상황. 아카데미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회자가 갑작스럽게 하차하는 악재가 겹쳤다. 언론들은 후임으로 거물급 흑인 방송인들을 거론했다.

한 연예매체는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가 아카데미 사회를 맡을 의향을 묻는 질문에 ‘절대 안 한다’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매체가 베테랑 코미디언 스티브 하비에게도 의중을 떠봤지만 “절대 아니다. 그들이 내 과거를 파헤치는 걸 원치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고참 방송인들에게도 아카데미 사회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부담으로 다가온 것이다.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진행한 배우 세스 맥팔레인은 한 인터뷰에서 “모든 눈이 쏠리는 무대에 서는 만큼 사회자는 수많은 의견을 듣게 된다”며 “사회를 수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망에 오를 만한 인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사할 뜻을 내비쳤다. 구인난에 시달린 AMPAS는 결국 사회자 없이 시상식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너무 하얀 오스카’ 극복할까

사회자 없는 아카데미 시상식은 1989년 제61회 이후 처음이다. 그해 시상식은 사회자의 ‘오프닝 독백’ 대신 배우 로브 로와 백설공주로 분한 동료배우가 등장하는 11분짜리 뮤지컬 공연을 선보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구성이나 내용이 기대에 못미쳤다는 혹평이 난무했다. 폴 뉴먼, 그레고리 펙 등 영화인 17명은 “아카데미와 영화산업계에 당혹감을 안겼다”는 공개서한에 서명했다. 아직도 ‘역대 최악의 오스카’로 회자된다.

올해는 다를까. 시상에 나서는 배우는 총 13명. 전원 아시아계 배우 캐스팅으로 화제가 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에 출연한 한국계 배우 아콰피나도 시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밖에 티나 페이, 우피 골드버그, 브리 라슨, 대니얼 크레이그, 제니퍼 로페스, 크리스 에반스, 에이미 폴러, 마야 루돌프, 샤를리즈 테론, 아만다 스텐버그, 테사 톰슨, 콘스탄스 우가 선정됐다. 미국 온라인매체 복스는 “변화는 서서히 나타난다”면서 “더 밝고 다양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메시지는 한 사람(공식 사회자)이 갑자기 나타나 농담을 할 때보다 활기 넘치는 시상자들을 통해 더 명확히 전달될 가능성이 크다”며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또 한 번 ‘블랙 열풍’이 불 수 있을지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2016년 남녀 주·조연상 후보 20명이 전부 백인으로 채워져 일부 영화인들이 시상식 보이콧을 선언했다. 당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sSoWhite)라는 해시태그로 물들었다. 이 움직임은 이듬해 주·조연상 후보에 유색인 배우 6명이 오르고, <문라이트>의 흑인 배우 마허샬라 엘리가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성취로 이어졌다.

올해는 작품상을 비롯한 7개 부문에 이름을 올린 <블랙팬서>가 돋보인다. 왕국을 지키기 위해 직접 슈퍼히어로로 나서는 와칸다의 왕 이야기로 등장인물 90%가 흑인이다. 백인문화 위주인 마블코믹스의 세계관에 아프리카 문화에 기반한 서사를 더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했다. 인종 간 화합을 그려낸 <그린북>도 주목해볼 만하다. 천재적 흑인 피아니스트와 하층민 백인 운전기사의 투어 여정을 그린 영화는 5개 부문에 올랐다.

복스는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운동에 이어 ‘미투’ 운동의 한가운데 있는 지금,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대화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백인들이 지배했고 현장에서 착취적이라고 비판받아온 영화계에 대한 재구상과 다양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노도현 국제부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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