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여성 정치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있다. 과거 여성 정치인들이 마음의 응원을 주고받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공동유세를 하고 자원봉사자를 서로 지원한다.
지난 6월 26일 미국은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목도했다. 무명의 29세 여성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테즈는 이날 뉴욕 연방 하원의원 14선거구 민주당 프라이머리(경선)에서 차기 하원 원내대표로 거론되던 10선 의원 조지프 크롤리를 꺾었다. 승산 없던 싸움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거인을 쓰러뜨린 이 여성은 하룻밤 사이 전국구 유명인사로 발돋움했다.

미국 뉴욕 주지사 민주당 프라이머리에 출마한 배우 신시아 닉슨. / AP연합뉴스
오카시오-코테즈의 승리는 11월 중간선거 경선을 앞둔 여성 후보들과 새로운 얼굴을 고대하던 유권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이길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조차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오카시오-코테즈가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오카시오-코테즈가 일으킨 바람이 또다른 여성 정치인들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3대 악조건’ 딛고 거물 제압
오카시오-코테즈는 영세 자영업자였던 미국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가사도우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 사회의 소득불평등을 체감하며 성장했다. 여성, 유색인종,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정치 지망생의 ‘3대 악조건’을 모두 타고난 셈이다. 그는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하고 집안이 빚더미에 오르자 칵테일 바에서 하루 18시간씩 일하며 어머니를 도왔다. 보스턴대 재학 중 에드워드 케네디 전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일하며 정치와 연을 맺었고, 2016년 버니 샌더스(무소속) 대선 캠프의 뉴욕지부를 조직했다.
오카시오-코테즈가 출사표를 던졌을 때 그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없었다. 크롤리는 민주당 내 서열 4위의 거물이었다. 크롤리의 지역구에서 경선이 열린 게 14년 만일 정도로 당내에는 그의 아성을 무너뜨릴 경쟁자가 없었다.
정치 경력이 일천한 오카시오-코테즈는 당내 지지기반 없이 밑바닥에서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유권자를 집집마다 찾아다니고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며 맨주먹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공약으로는 이민관세수사청 폐지, 전국민 메디케어(65세 이상 건강보험) 가입, 연방정부의 일자리 보장, 여성·성소수자·노인 권익 신장, 금융규제 강화 등 민주당의 기존 노선보다 진보적 의제를 내걸었다.
오카시오-코테즈가 지역구를 발로 뛰어다니는 사이, 크롤리는 워싱턴에서 중앙정치에 골몰하고 있었다. 유권자들의 표심은 먼 곳에 있는 크롤리보다 자신의 집 현관문을 두드린 오카시오-코테즈에게 기울었다. 14선거구(브롱크스·퀸스)에 라틴계가 많이 산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오카시오-코테즈는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뉴욕 토박이다.
뉴욕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지역이기 때문에 오카시오-코테즈는 중간선거에서 낙승할 가능성이 높다. 그가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면 이 지역구 최초의 여성 유색인종 의원이자 최연소 하원의원이 된다. 새로운 역사를 쓰는 것이다.
경선 승리가 확정되던 날 오카시오-코테즈는 영리하게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여성 후보의 이름을 알리는 데 활용했다. 그는 승리 연설에서 매사추세츠주, 미주리주 연방 하원의원 경선에 출마한 아야나 프레슬리와 코리 부시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러자 프레슬리의 트위터 팔로어가 하루 만에 5000명 이상 증가했다. 일종의 ‘오카시오-코테즈 효과’다. 부시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오카시오-코테즈가 내 이름을 말한 뒤) 내 소셜미디어와 이메일이 난리가 났다. 정치후원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며 “오카시오-코테즈의 승리는 우리의 레이스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테즈(왼쪽)가 7월 12일 뉴욕 시내에서 뉴욕주 검찰총장 후보로 출마한 제피르 티치아웃(오른쪽) 지지발언을 하고 있다. / 뉴욕 | EPA연합뉴스
‘오카시오-코테즈 효과’ 점차 확산
뉴욕 주지사 경선에 나선 신시아 닉슨도 오카시오-코테즈 효과를 누렸다.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변호사 미란다를 연기했던 배우 닉슨은 높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유권자들은 ‘정치 경험 없는 유명인’에게 쉽게 믿음을 주지 않았다. 민주당 기득권 대다수는 현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를 지지했다. 지난 6월 13일 한 여론조사에서 쿠오모의 지지율은 61%인 반면 닉슨은 26%에 그쳤다.
그러나 닉슨 지지의사를 밝혔던 오카시오-코테즈가 승리하자 닉슨의 주가도 올랐다. 오카시오-코테즈의 경선 당일에만 새로운 후원자 300여명이 닉슨 캠프에 1만5000 달러(약 1700만원)를 기부했다. 몇몇 민주당 중진들이 닉슨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뉴욕주 검찰총장에 출마한 제피르 티치아웃, 뉴욕주 상원의원에 도전하는 줄리아 살라사르 역시 오카시오-코테즈 효과의 수혜자다. 살라사르는 오카시오-코테즈 경선 당일 후원금 2만 달러를 모금했고, 같은 날 티치아웃의 캠프엔 자원봉사자 120여명이 신규 등록했다.
미국의 여성 정치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있다. 과거 여성 정치인들이 마음의 응원을 주고받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공동유세를 하고 자원봉사자를 서로 지원한다. 살라사르는 뉴욕 14선거구 투표일을 앞두고 오카시오-코테즈와 함께 거리 유세에 나섰다. 오카시오-코테즈 캠프에 있던 자원봉사자들은 경선이 끝나자 닉슨과 티치아웃, 살라사르 캠프로 파견됐다.
여성 정치인들은 선거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방법이나 외모에 대한 비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요령도 서로 공유한다. 러트거스대 ‘미국 여성·정치센터’의 켈리 디트마르 교수에 따르면 “이들 여성 후보 대부분은 당의 지지를 받지 못하거나 당의 인적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정치자금과 자원봉사자 등을 동원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카시오-코테즈의 인기가 다른 여성 후보들의 승리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지도가 낮은 후보일수록 익숙한 인물에게 투표하려는 유권자들의 관성을 흔들어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어야 한다. 제2의 오카시오-코테즈가 될 여성은 누구일까. 중간선거 경선은 9월까지 진행된다.
<최희진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dai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