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쓰레기 시위가 ‘쓰레기 혁명’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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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처리장 하나 못 만드는 현실은 레바논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한심한 정치인들과 살고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깨닫게 했다. 시민들은 시위의 이름을 ‘You Stink(너희들 냄새나)’라고 지었다. 여기서 ‘You’는 물론 정치인들이다.

시작은 쓰레기였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선 지난 7월부터 도심 곳곳에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정부와 계약한 쓰레기 매립업체의 계약기간이 끝났지만 정부는 후임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매립지는 문을 닫았고, 갈 곳을 잃은 쓰레기는 매일 수천톤씩 거리에 버려졌다. 거리에선 악취가 진동했고, 전염병이 돌 것이라는 공포가 퍼졌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제발 좀 쓰레기를 치워달라”고 외쳤다. 수십명에서 수백 수천명으로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거리 시위가 한 달을 훌쩍 넘은 지금, 레바논 시민들이 치워버리고 싶은 것은 그냥 쓰레기가 아니다. 시위대는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레바논의 무장정파 헤즈볼라까지 가세했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시민들이 8월 26일(현지시간) 거리에서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행진하고 있다. / 베이루트 AFP연합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시민들이 8월 26일(현지시간) 거리에서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행진하고 있다. / 베이루트 AFP연합

4년 넘은 내전으로 시민들 삶 악화
쓰레기 청소 시위가 어떻게 정권운동으로까지 격화됐을까. 레바논의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시민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 시리아,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레바논은 의회가 여러 종파로 나뉘어 치열한 대립을 벌이고 있다. 총 18개 종파로 나뉘어진 레바논의 내부 싸움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친수니파와 이란, 시리아를 주축으로 한 친시아파의 대립으로 요약된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시리아 내전이 4년 넘게 계속되면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갈려 대립은 더욱 심화됐다.

정파 간 대립은 다른 국가에서 라이벌 정당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정도가 아니다. 대립이 격심지면서 레바논은 2014년 5월 이후 대통령이 공석이다. 총리가 정치를 책임지는 의원내각제이지만, 정치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에 빠져 있다.

쓰레기 처리장 하나 못 만드는 현실은 레바논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한심한 정치인들과 살고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깨닫게 했다. 가난한 나라에서 정치투쟁이 계속되면서 경기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레바논 시민들은 수도가 끊기고 전기가 끊기는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 그리고 이번엔 쓰레기까지 시민들의 삶을 덮쳤다.

시민들은 시위의 이름을 ‘You Stink(너희들 냄새나)’라고 지었다. 여기서 ‘You’는 물론 정치인들이다. ‘어떤 쓰레기들은 재활용돼선 안 된다(Some trash should NOT be recycled)’라는 문구에 레바논 정치인들의 얼굴 사진들을 붙인 팻말도 등장했다.

지난 8월 22일 밤(현지시간) 베이루트 거리에서는 최대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수위가 높아지자 경찰은 폭력진압을 시작했다. 물대포와 최루가스, 고무탄과 공포탄도 동원됐다. 소셜미디어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폭행했다는 증언과 실탄을 발사했다는 증언까지 올라왔다. 시위대와 경찰은 이틀 동안 충돌했고, 그 결과 시위에 참가한 시민 1명이 목숨을 잃었고 4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23일 오후 늦게 탐맘 살람 총리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살람 총리는 “시민들의 집회·시위의 자유는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며 “시위대에 해를 입힌 사람은 누구든지 응당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난 시위대를 잠재우려는 듯 보였던 살람 총리의 발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살람 총리는 “쓰레기 문제는 낙타의 목을 부러뜨리는 짚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미 부러지고도 남을 만큼 꺾인 목에 얇은 짚단 하나가 더해진 것일 뿐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살람 총리는 “더 큰 문제는 레바논의 정치적 쓰레기”라며 “우리의 정치는 위기에 빠져있다”고 말했다. 살람 총리는 “레바논은 현재 경제적으로도 큰 위험에 빠져 있다”며 “우리 정부는 다음달 공무원들의 월급도 주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말했다. 갑작스런 자아비판을 한 총리는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자신이 사임할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총리의 발언은 시위대를 조금도 진정시키지 못했다.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시위대는 더 큰 함성으로 “떠나라! 떠나라!”를 외쳤다.

지난 7월 26일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던 한 시민이 거리 한복판에 쌓인 ‘쓰레기 산’ 앞에서 마스크를  쓴 채 코를 막고 있다. / 베이루트 AFP연합

지난 7월 26일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던 한 시민이 거리 한복판에 쌓인 ‘쓰레기 산’ 앞에서 마스크를 쓴 채 코를 막고 있다. / 베이루트 AFP연합

헤즈볼라 개입으로 주변국들 긴장
25일 총리는 긴급 내각회의를 열고, 새로운 쓰레기 처리업체를 제안했다. 그러나 회의에 모인 장관들은 전원 새 업체 선정을 거부했다. 새 업체에 지불해야 할 비용이 너무 높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선정했는지 의문스럽다는 게 이유였다. 이제 진짜 쓰레기보다 ‘정치 쓰레기’ 청소를 더욱 원하게 된 시민들은 “입 다물고 사퇴하라”며 시위의 수위를 더욱 높였다.

데일리스타 등 레바논 언론과 주요 외신들도 쓰레기 위기는 이제 레바논 정치의 위기가 됐다고 전했다. 미성년자부터 노인들까지 거리로 나와 무능한 정치현실을 낱낱이 비판하고 있다.

친구 3명과 함께 시위에 나온 20대 청년은 높은 실업률을 비판했다. 이 청년은 로스앤젤레스타임스 취재진에게 “우리를 봐라. 우리는 모두 20대인데 4명 모두 직업이 없다”고 말했다. 13살 딸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온 한 여성은 “이 나라에서 정치쓰레기들을 몰아내고 싶어 나왔다”고 말했다.

레바논 정부는 시위대의 진입을 막으려 콘크리트 장벽을 세웠지만, 시민들은 장벽에 정치인들을 조롱하는 벽화를 그려넣었다. 한 시민은 “정치인들은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벽을 세웠지만, 이 벽 때문에 우리의 소리는 전 세계로 더 멀리 퍼져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살람 총리는 25일 장벽을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쓰레기 시위는 ‘쓰레기 혁명’이 될 수 있을까. 레바논 시민들은 중동 민주화 바람을 몰고 왔던 2011년 아랍의 봄 기적이 레바논에서 재현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그러나 시위가 잘못될 경우 더 큰 위기와 내전을 몰고온 시리아의 실패를 뒤쫓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총리가 내각회의를 열던 날 회의에는 무장정파 헤즈볼라 측 장관도 참석했고, 그는 반대입장을 냈다. 그리고 다음날 헤즈볼라는 시위대의 정권퇴진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알아라비야 방송은 “쓰레기 논쟁에 헤즈볼라가 입장했다”고 전했다.

헤즈볼라의 개입은 시위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 아랍의 봄을 짓밟은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고 있는 헤즈볼라는 레바논 의회에서 12석을 가진 정당조직이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벨트’를 누구보다 경계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국가들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장은교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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