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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화당 악재로 떠오른 ‘강간 막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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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계에서는 1996년 기준 미국 내에서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5%가 연간 3만2000건의 원치 않는 임신을 겪고 있다고 지적한다.

“진짜 강간이라면 임신이 안된다”는 미국 미주리주 상원의원에 출마한 공화당의 토드 에이킨 후보의 ‘막말’이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뜨거운 변수로 떠올랐다. ‘낙태’가 이슈로 떠오르면서 버락 오바마 정부의 부진한 경제 성적을 매섭게 몰아치려던 미 공화당의 전략에 차질이 빚어졌다. 게다가 공화당 내에서 ‘낙태’를 둘러싼 입장 차이를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공화당은 파장을 줄이는 데 부심하고 있다.

토드 에이킨 미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가 ‘강간 발언’ 이튿날인 8월 20일 기자들을 만나 자신의 발언을 해명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토드 에이킨 미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가 ‘강간 발언’ 이튿날인 8월 20일 기자들을 만나 자신의 발언을 해명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토드 에이킨 후보가 문제의 발언을 한 것은 8월 19일 지역 TV방송에서였다.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일 경우 낙태를 허용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정말 성폭행(legitimate rape)이라면 여성은 체내에서 (임신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폐쇄하도록 반응하기 때문에 임신할 가능성이 없다”고 답변했다.

말하자면 ‘진짜 성폭행’이었을 경우에는 임신이 되지 않고 ‘성폭행이 아니었을 경우’에 여성이 임신하게 된다는 해괴한 생물학 논리이다.

당장 여성계와 낙태 찬성론자들이 질타하고 나섰다. 그와 미주리주 상원의원을 놓고 경쟁 중인 민주당의 여성후보 클레어 매카스틸은 “성폭행 피해자의 고통을 무시한 발언이자, 피해자를 공격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의학계에서는 1996년 기준 미국 내에서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5%가 연간 3만2000건의 원치 않는 임신을 겪고 있다고 지적한다. 2003년 학술지 <휴먼네이처>에 실린 또다른 연구는 합의하에 가진 성관계보다 강간으로 임신할 확률이 2배에 이른다고 지적하고 있다.

무지 드러나는 중세적 사고방식
에이킨은 파장이 커지자 사과에 나섰다. 자신의 발언이 “많은 피해자들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광고를 통해서도 “강간은 악랄한 행위”라면서 “두 딸을 둔 아버지로서 약자를 착취하는 이들에게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고 밝혔다.

사실 ‘진짜 강간’ 개념은 서구 보수사회 내에서 역사가 길다. 영국 가디언은 이 개념이 13세기 영국 법조문에도 등장한다고 지적한다. “여성이 사건 당시 동의하지 않는다면 임신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남성 중심성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생물학적 무지가 드러나는 중세적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1814년 새뮤얼 파의 <법의학>에도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성행위 당시 (여성이) 즐거움을 느끼거나 욕정으로 흥분하지 않는다면 임신은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므로 완벽한 강간(absolute rape)이라면 여성은 임신할 가능성이 없다.” 역사학자 토마스 라쾨르는 당시 사람들이 여성의 질과 난소를 외부로 드러나지 못한 남성의 음경과 고환으로 여겼다고 지적한다. 남성이 성적 흥분의 절정에서 사정을 하듯, 여성도 그럴 것이라고 추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간으로 임신을 했다는 것은 여성이 그 상황을 ‘즐겼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 같은 개념은 현대에 들어서도 일부 의학계에서 끈질기게 이어진다. 1972년 미국의 프레드 메클렌버그 박사는 한 글에서 “강간을 통한 임신은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었다. 정신적 충격에 빠진 여성은 배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성적 결합에 앞서 미리 배란이 이뤄져야 하는 여성의 신체구조와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지만, 이후 수십년 동안 미국의 낙태 반대론자들의 근거가 되었다. 1995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인 헨리 앨드리지가 빈곤층 여성에 대한 낙태 비용 지원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면서 “정말로 강간당한다면 임신이 불가능하다. 이는 의학계에서도 밝히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8월 22일 네브래스카주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웃고 있다. | AP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8월 22일 네브래스카주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웃고 있다. | AP연합뉴스

이번 사안이 정치적 폭발력을 갖는 것은 공화당이 기본적으로는 에이킨처럼 낙태 반대 입장이기 때문이다. 같은 부류로 유권자들이 인식한다면 공화당은 여성 유권자들을 비롯해 온건보수 성향의 지지자들을 잃게 된다. 파장을 의식한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는 “나는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며, 성폭행에 따른 임신의 낙태에도 반대하지 않는다”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 폴 라이언은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더라도 낙태를 반대하는 매우 강경한 입장이다. AP통신은 “이 같은 입장차는 공화당의 지지기반으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는 복음주의 기독교회의 초강경 이데올로기와 낮은 세금과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티파티 지지자들을 화해시키는 데 있어 공화당이 겪는 근본적인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은 에이킨의 발언이 오는 11월 상원 선거에서 민주당으로부터 4석을 빼앗아 100석 중 다수당을 차지하려는 미 공화당의 선거전략에 차질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했다. 에이킨과 거리를 두려는 미 공화당의 움직임은 그 때문이다. 롬니는 노골적으로 그의 후보 사퇴를 요구했고, 라이언은 그를 따로 만나 같은 충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지도부는 에이킨에 대한 500만 달러 선거자금 지원을 중단하고 후보 교체가 가능한 21일까지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에이킨은 자신의 발언이 잘못된 것이라고 거듭 사과하면서도 당의 요구는 수용하지 않았다. 선거비용은 풀뿌리 지지자들의 지원만으로 충당한다는 계획이다. 공화당 텃밭인 미주리주에서 승리를 자신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에이킨은 여전히 민주당 후보를 앞서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 상원후보 사퇴 요구
8월 27~30일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열리는 전당대회에 앞서 에이킨 악재를 치우고 대선행보를 시작하려던 공화당은 당혹스럽게 됐다. 롬니의 사퇴 요구를 당원이 수용하지 않으면서 모양새를 구겼다. ‘낙태’ 논란이 계속 이어질 경우 공화당 대선전략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집권 이래 경제성장에서 뚜렷한 실적을 내지 못한 오바마 행정부를 공격하려 했지만, 미국의 대표적 이념논쟁 주제인 낙태가 떠오르면서 민주당이 파상공세를 펼 계기가 마련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0일 일정에도 없던 백악관 브리핑에서 “성폭행은 성폭행”이라고 일갈하고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만약 여성 유권자들에게서 지지를 확대하지 못한다면 롬니는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보여주듯 NBC와 월스트리트저널이 공동실시한 최신 여론조사에서 롬니 후보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4%포인트나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에이킨의 ‘성폭력 임신’ 발언 등 악재가 이어지면서 롬니 후보가 경제 이슈를 집중 제기하는 데 실패했고, 지지율이 답보상태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최민영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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