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피노체트 추종자들은 정치세력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들은 군정 당시 집권당인 국가진보당의 재건을 추진하고 있다. 국가진보당은 피노체트 장기집권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웠다. 하지만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서 1991년 해산됐다. 이후 당원들은 현재 피녜라 대통령이 이끄는 보수우파 연립정부의 한 축을 이루는 독립민주당에 흡수됐다. 현 정권 내에도 피노체트의 잔존세력이 남아 있는 셈이다.
민주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하고 17년간 칠레를 철권 통치한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15~2006년)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피노체트 추종자들이 지난 6월 10일(현지시간) 수도 산티아고의 한 극장에서 2006년 그의 사망 이후 최대 규모의 군중집회를 가졌다고 AFP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경찰은 이른 시간부터 피노체트 추모시위 집회를 막기 위해 카우폴리칸 극장 주변을 봉쇄했다. 이 극장은 피노체트 집권 시절 반정부 시위가 열렸던 장소다. 피노체트 지지자들이 극장으로 입장하면서 물리적 충돌이 시작됐다.
피노체트 정권 아래 희생된 이의 유가족 및 인권운동가로 이루어진 3000여명의 반대자들은 ‘살인자’, ‘파시스트’라고 외치며 계란을 던지거나 침을 뱉었다. 이에 맞서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피노체트 통치 당시 실종자들을 조롱하는 현수막을 들었다. 반대집회가 격렬해지자 경찰은 피노체트 추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루탄과 물대포로 진압에 나섰다. 칠레 경찰당국은 이날 충돌로 22명이 다치고 64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극장 안에는 ‘피노체티스타스’로 불리는 피노체트 추종자 120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칠레 국기와 피노체트의 사진을 열렬히 흔들었다. 피노체트 쿠데타를 옹호하다 군에서 해직당한 피노체트의 손자도 참석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행사는 ‘9월 11일’이라는 단체가 주도했다. 9월 11일은 1973년 피노체트가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날이다. 이들은 피노체트 옹호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피노체트는 칠레를 공산주의로부터 구한 국가적 영웅 이지만, 좌파들에 의해 국고를 횡령하고 인권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로 모함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표현의 자유’ 이유로 추모집회 허가
행사를 주도한 퇴역 육군장교 후안 곤잘레스는 “피노체트 시대의 왜곡된 기록을 바로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여동생은 공개적으로 피노체트 군에 고문당한 경험을 밝힌 바 있었다. 하지만 곤잘레스는 “고문이나 살인은 모두 좌파 반군 소탕과정에서 있던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독재 시절 범죄들이 피노체트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실종자 명단은 정부 보상을 받기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이나 다른 이유로 죽은 사람들이 올라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초 인권단체들은 피노체트 추모집회 개최 금지 요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8일 추모집회를 허가했다.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희생자 유족들은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에게도 집회 금지 탄원 편지를 보냈지만 추모집회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통령 대변인은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집회를 막을 수 없다”며 “과거 인권탄압 정권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유감스럽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피노체트에게 헌사를 바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산티아고타임스는 11일 피노체트 추모 움직임이 상식적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변화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알베르토 코두 디에고 포르탈레스대학 교수는 “문제는 이번 사건으로 피노체트 지지자들이 희생자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자칫 피노체트 지지자들이 탄압받는 것처럼 비쳐져 세를 결집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날 사건은 40여년 전 피노체트 집권 이래 계속되고 있는 칠레의 정치적 분열상을 보여준다. 피노체트는 1973년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칠레의 첫 사회주의 정권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1970~1973년)를 무너뜨리고 1990년까지 집권했다. 민주주의가 회복된 이후 피노체트에 대해 인권탄압과 부정축재 혐의로 고소·고발이 잇따랐다. 그러나 그가 91세로 사망하기까지 실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9월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피노체트 집권 기간 인권탄압 피해자는 4만여명, 사망·실종 인사는 3225명에 달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회를 폐쇄하고 수많은 민주인사를 추방·학살한 그의 악행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피노체트에게 커다란 반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피노체트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칠레가 경제발전을 이루고 남미의 실패한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도록 했다며 추종하는 세력도 있다.
현재 피노체트 추종자들은 정치세력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들은 군정 당시 집권당인 국가진보당의 재건을 추진하고 있다. 국가진보당은 피노체트 장기집권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웠다. 하지만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서 1991년 해산됐다. 이후 당원들은 현재 피녜라 대통령이 이끄는 보수우파 연립정부의 한 축을 이루는 독립민주당에 흡수됐다. 현 정권 내에도 피노체트의 잔존세력이 남아 있는 셈이다.
‘피노체트 교육제도’ 교육격차 키워
2010년 취임한 피녜라 대통령은 피노체트 퇴진 이후 계속되던 좌파정권을 물리치고 20년 만에 우파정권을 세웠다. 당시 선거 결과는 20년간 이어진 중도좌파연합 콘세르타시온(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연합)에 대한 칠레 유권자들의 환멸감의 표현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콘세르타시온은 집권 기간 중 칠레 민주주의 발전과 현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10년 만의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칠레 유권자들은 경제대통령을 원했다. 기업 최고경영자 출신의 피녜라 대통령은 칠레 경제를 2018년까지 선진국으로 진입시키겠다는 공약을 통해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었다.
피녜라 대통령은 집권 기간 중 외부적으로는 안정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국내적으로는 많은 반발에 시달렸다. 지난 1월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피노체트 집권 시기를 ‘군사독재’ 대신 ‘군사정권’으로 바꾸려다 비판에 직면했다. 당시 칠레 교육장관은 “일반적으로 ‘군사정권’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는 타국의 사례를 반영했으며 정치적 의도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좌파정권을 꺾고 집권한 우파 피녜라 대통령이 독재를 두둔한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결국 지식인사회와 야당, 인권단체의 반발로 개정 시도는 중단됐다.
피노체트의 유산은 피녜라 대통령도 곤궁에 빠뜨렸다. 칠레 대학생들은 지난해 5월부터 교육개혁 요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학생들은 과거 피노체트 정권 시절 도입한 시장 중심 교육제도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독재정권 시절 만들어진 시스템이 공립학교의 몰락과 빈부간 교육 격차를 확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교육투자 확대와 무상교육을 요구하고 있다. 피녜라 대통령은 2010년 전 세계를 감동시킨 ‘칠레 매몰광부 구조’ 사건의 성공적 해결 덕분에 지지율이 60%가 넘었지만, 격화되는 학생 시위로 지지율이 반토막난 지 오래다. 지난해 10월 학생 시위를 억제하기 위해 피노체트 정권 시절의 집회와 시위 제한 포고령을 부활하려다 여론의 역풍을 맞기도 했다.
이날 집회에서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아옌데 대통령의 기념물도 대통령궁에 있는데 왜 우리의 추모 다큐멘터리는 상영하지 못하냐는 주장을 폈다. 쿠데타 당일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궁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숨졌다(칠레 정부는 살해의혹을 일축하고 자살로 결론냈다). 그리고 현재 대통령궁 아옌데 동상에는 “나는 조국의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마지막 라디오 연설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칠레 민주화 20년. 독재자 피노체트의 망령은 현재진행형이다.
<배문규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obbel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