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성 살충제 부작용 시달리는 중남미 농장 노동자 대형 기업 상대로 소송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고 있는 과일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열대 과일. 바나나다.
바나나가 싼 값에 세계에 대량 보급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오랫동안 살충제와 농약에 노출돼 이유를 모른 채 불임과 백혈병, 암 등을 앓아온 바나나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이 대형 기업들을 상대로 산발적인 소송들을 벌이고 있다.

지난 6월 27일 인도 알라하바드에서 한 노동자가 바나나를 트럭에 싣고 있다. 라제쉬 쿠마르 싱/AP연합뉴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최근에 있었던 바나나 노동자들의 소송을 소개했다.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지난 6월 27일 중남미 바나나 노동자들이 거대 바나나 유통 기업과 살충제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출신의 전직 바나나 농장 근로자 160여명은 세계 최대 바나나 생산기업인 돌(Dole)과 치키타(Chiquita), 그리고 정유기업인 쉘(Shell’s)과 화학기업인 다우(Dow)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바나나 생산업체와 화학기업이 사용한 위험한 살충제에 장시간 노출돼 불임 및 불구가 됐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이 4곳의 기업들이 DBCP와 같은 소독·살충에 이용되는 독한 훈증약을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20년 넘는 기간 농장에 사용해왔다고 밝혔다. 특히 이들은 이 약이 인간에게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노동자들에게 이를 알리지 않고 약을 써왔다고 고발했다. 노동자들의 변호인단은 기업들이 살충제에 노출된 노동자들에게 수백만 파운드의 개인 보상을 하라고 주장했다.
문제가 된 살충제 DBCP는 작은 선충과 벌레를 잡으려는 목적으로 석유 기업인 쉘과 케미컬 회사인 다우에 의해 개발됐다.
개발 당시 쉘은 독성학 전문가를 고용해 DBCP에 대한 유해성을 보고받았다. 1958년 전문가들이 동물 실험을 토대로 작성한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DBCP에 노출된 쥐들이 콩팥과 폐에 병변이 발견돼 죽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우 또한 자체적으로 유해성에 대해 연구를 했으며 결과에 따르면 DBCP는 ‘피부에 빠르게 흡수되며, 흡입될 경우 인체에 독성이 높다’고 알려졌다. 또한 ‘반복적으로 이 약품에 노출될 경우 고환에 병변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가 내부적으로 보고되자 전문가들은 DBCP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에게 약물 불침투성 작업복을 입혀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비용적으로 ‘터무니 없다’며 이 제안을 기각했다.
부작용 알면서 노동자에게 알리지 않아
1960년대 초 다우와 쉘은 바나나 생산업체인 돌과 치키타에 이 약품을 홍보하기 시작했으며 유해성을 알리지 않은 채 판매를 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전문가의 내부 보고서에 대한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이후 돌과 치키타는 중남미 대륙에서 광범위하게 이 약품을 사용해왔다.
약품의 유해성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77년이었다. DBCP를 생산하는 미국 캘리포니아 화학공장에서 35명의 근로자들이 불임 증상을 호소한 것이다. 79년 미 당국은 자국 영토 내에서 DBCP의 생산과 이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바나나를 생산하는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등에서는 79년 이후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현재 50~60대가 된 노동자들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 화학약품의 반복적 노출로 자신들이 불임이 됐으며 암 발병률도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 외에도 각막 훼손, 피부병을 앓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DBCP가 몸 속으로 얼마나 많이 흡수됐으면 밤마다 소변에서 화학약품 냄새가 진동을 했겠는가”라고 밝혔다. 이들은 병으로 인해 지역사회에서 낙인이 찍혔으며, 개인적으로도 이혼을 하거나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호소했다. 특히 중미의 시골 지역은 가톨릭 정서가 지배하는 곳으로 가족의 가치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곳이다. 대가족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이곳에서 자녀를 가질 수 없었던 바나나 노동자들은 지역사회로부터 서서히 버림을 받고 결국 삶의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자녀를 입양했다.
다국적 기업 침묵하지만 유해성 입증
바나나 소송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7년에도 니카라과 농부들이 거대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법원은 돌과 다우 등에게 30년 전 니카라과의 바나나 농장에서 살충제 피해를 입은 일꾼 6명에게 보상을 하라고 판결했다. 1993년 DBCP에 노출된 1만6000명의 노동자들도 소송 제기 끝에 평균 2500달러의 보상금으로 합의를 봤다.
계속되는 소송에 대해 피고인 다국적 기업들은 잡아떼기로 일관하고 있다. 돌은 성명서를 내고 “1979년 이후 DBCP의 구매를 중단했으며 이는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DBCP의 사용이 농장 근로자들에게 불임을 유발했다는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며 “DBCP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신뢰할 만한 과학적 연구도 진행된 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민간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조사와 연구는 바나나 생산업체에서 사용한 살충제의 유해성을 입증하고 있다.
1999년 진행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코스타리카 바나나 농장의 포장시설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백혈병 발병률과 선천성 기형아 출산율이 국가 평균보다 두 배나 높았다. 2002년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코스타리카의 남성 바나나 노동자 중 20%가 불임이었다고 한다.
바나나 노동자들의 착취와 피해는 어느 정도 예상된 바였다. 20세기 들어와서 바나나 생산이 대량 산업화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바나나는 매년 1700만톤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수입 과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댄 쾨펠이 지난해 출간한 <바나나>라는 책에 따르면 돌과 치키타의 바나나 산업화 역사는 1885년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조그마한 무역으로 바나나 수입을 시작하면서 니카라과, 콰테말라 등 중앙아메리카에서 바나나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부당한 임금, 화학약품으로 인한 질병으로 괴로워했다. 그러나 돌과 치키타는 오히려 바나나 농사로 농토가 망가지면 그 지역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이전해버리면서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모른 척해버렸다.
바나나 노동자들의 힘겨운 소송. 우리에겐 달콤한 과일로, 다이어트 식품으로, 풍부한 영양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바나나가 바다 건너 중남미의 노동자들에겐 지옥보다 끔찍한 과일인 셈이다.
<심혜리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grac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