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항쟁의 발원지 포코쿠 르포, 시위 주동 승려들 ‘의지’ 결연

포코쿠 사원 한 비구니 스님이 빼곡히 메모한 책을 들고 공부하고 있다.
포코쿠 승려들이 ‘또’ 나섰다. 세상을 놀라게 했던 9월 대규모 시위에 불을 붙인 ‘9·5 승려폭행사건’이 바로 이곳에서 발생했는데, 이 지역 승려들이 다시 폭력진압으로 강요된 약 한 달간의 고요를 깼다. 10월 31일 100여 명이 불경을 외며 타운을 행진했고, 인터넷과 휴대전화도 다시 끊겼다.바깥세상과 또 다시 단절된 11월 초순의 버마, 나는 ‘반란의 타운’ 포코쿠를 찾았다.
타운 부유층의 기부음식 배분
만달레이에서 버스로 약 6시간. 유네스코 지정 불교 유적지 바간에서 버스나 배로 두 시간 안에 닿는 포코쿠는 총 15개 구역으로 나뉜 고만고만한 타운이다. 마을 한켠으로는 이라와디 강이 흐르고 있고 그 강변에는 겨우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가옥 몇 채가 돼지를 쫓으며 즐거워하는 땟국물 가득한 아이들을 품고 있다. 양곤, 인레, 만달레이, 바간-버마의 뻔한 여행 코스에 널리고 널린 게 깔끔한 중저가 호텔들이건만, 포코쿠의 몇 안 되는 호텔은 완전 딴판이었다. 전기는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아침 7~8시 정도까지만 나왔고 이래 봬도 겨울인지라 어둑해진 초저녁은 금새 한밤중으로 변했다. 새삼스러울 건 없다. 조금 더 요란하게 발전기가 돌아갈 뿐, 제 2의 도시 만달레이도 같은 수준이다. 어둑한 타운 한 귀퉁이에는 촛불 하나 세워놓고 튀김을 부치는 한 가족 세 식구가 동네 사람들의 저녁 반찬을 부지런히 뒤집고 또 팔고 있다.
“시위 도중 체포된 승려 한두 명이 기둥에 묶인 채 총 뒤꿈치로 죽도록 맞았고, 결국 죽었다.”
소문처럼 떠돌던 ‘포코쿠 스토리’를 상기하며 도착한 다음 날, 새벽마다 등장하는 승려들을 찍기 위해 이른 시각 호텔 을 나섰다.
4시 반부터 시작된 요란한 확성기 음악과 설교 소리를 따라갔다. 그 소리의 발원지에서는 이 타운 부유층들이 특별히 기부한 음식과 돈을 동네 승려들에게 배분하고 있었다.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어린 승려부터 ‘퐁지’라고 불리는 출가 승려들에 이르기까지 한 줄로 길게 서서 엄청난 양의 밥과 반찬 그리고 국을 매일 이 시간에 배분받는다. 음식을 배분하는 손길 역시 어린 꼬마부터 노인네까지 다양했다. 마지막은 기부금 전달로 끝이 났다. “아무리 어려워도 주민들은 기부한다. 그걸로 먹고사는 우리는 그들의 곤궁한 현실에 책임감을 느낀다.” 한 승려의 말이다. 그 새벽밥이 승려들의 아침이고 점심은 오전 11시쯤. 그리고 하루의 식사는 끝난 채 공부와 명상이 이어진다.
한국의 광주항쟁 상황과 비교
사원으로 돌아가는 장난기 가득한 어린 승려들의 ‘항아리’ 밥그릇에 ‘튀김보시’를 얹어주며 슬쩍슬쩍 따라 걸었다. 내 호텔을 지나 20m쯤 더 걸었을 무렵 나를 기다리던 호텔 주인이 바쁜 걸음으로 쫓아와 부른다. “지금 사원 따라 가나? 가지 마라.” 그는 간밤에 기관들이 전화해서 ‘도착 후 내가 무엇을 했는지’ 등 온갖 질문을 던졌다며 사원을 따라가는 건 위험하다고 일렀다. “당신 호텔에 묵는 손님은 당신 책임이야!” 여러 도시, 여러 호텔 직원을 통해 종합한 바로는 호텔로 이렇게 전화를 해대는 기관은 최소한 세 곳이다. 이민성, 정보국, 타운 십의 담당공무원.
며칠 후, 나는 9월 5일 시위에서 ‘죽도록’ 맞았다는 승려 세 명 중 한 명을 어렵사리 찾아낼 수 있었다. 군의 공중 경고 사격으로 흩어져 집으로 숨어들었으나 나오라고 윽박지르는 소리를 듣고 “나가야 할 것 같아” 나와 버렸단다. 그리고 볼, 턱, 머리, 입 등에 ‘AK 47’ 뒤꿈치로 퍼붓는 매를 고스란히 맞았다. 경찰서 안에서는 승복을 벗긴 채 웃옷 없이 롱지만 입힌 채 심문했다. 그러고는 승복을 다시 입힌 후, 소속 사원 고참 승려들을 불러 ‘데려가라’고 했다. 이들은 그날 풀려났지만 다음 날 정부 차량 4대를 불태울 정도로 승려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그 분노가 결국 전국의 주요도시로 이어져 거대한 함성이 되었다.
타운을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시위를 주동한 승려 세 명과 마주 앉았다. 시위를 주도했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는 건 결코 아니다. 버마 전역에 만연한 공포감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다. 사실관계를 묻는 질문부터 시작해 약 1시간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번 인터뷰에서 나는, 그동안 세상에 아주 어렴풋하게만 알려진 버마의 커뮤널 폭동 (1990년대 후반 이래 만달레이와 페구 등 중북부 지역에서 인도계 모슬렘과 불교도 승려 간의 갈등이 폭력사태로 이어진) 와중에 3~4년 전 군이 포코쿠 지역의 한 사원에 총격을 가한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승려들은 정부 차량방화가 당시 총격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아웅산 수치와 이미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온 탄슈웨 장군의 대화를 신뢰하지 않는다며 ‘광주’를 입에 올렸다.
“우린 남한 국민들이 군부정권에 대항했던 광주항쟁과 우리 버마의 상황을 비교해본다. 우린 이 군사 정부가 끝장나길 원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한밤중’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손님을 붙들고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호텔 주인장에게 장단을 맞추면서도 나는 딴 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포코쿠(중부 버마)┃이유경 penseur21@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