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신동 진보라, 그녀의 어머니 이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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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진보라는 국악과 재즈, 제3세계 민속음악을 접목한 에스닉 재즈(Ethnic Jazz)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는 ‘보라표 음악’을 만들고 싶다. 엄마 이수경은 1984년 연극 <망나니>의 주연으로 전국 연극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결혼 후 아이와 함께 노는 건 무대에서 맛보지 못한 재미와 보람이 있었다. 연기를 그만두었지만, 후회해 본 적은 없다.

진보라. 16세의 소녀가 재즈 피아노 대회를 통해 세상에 나타났을 때, 나는 신선한 쾌감을 느꼈다. 온종일 피아노만 치고 싶어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었다는 소녀는 피아노 위에서 마음껏 놀며 음악을 통해서 자신을 얼마나 표현해낼 수 있는지 실험하는 듯 보였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소녀는 미국 버클리 음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고, 출국을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하지만 얼마 뒤, 입학식에 가지 않고 한국으로 되돌아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아무튼 그녀의 행보는 일반적인 ‘상식’을 경쾌하게 배반했다.

진보라의 연주를 들으면 피아노 건반 속에 다른 악기가 숨어서 합주를 하는 듯하다. 진보라에게 88개의 피아노 건반은 너무 작은 세상이다. 하지만 88개의 건반을 가지고도 원하는 소리를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기에 가장 넓은 세상이기도 하다. 피아노의 가장 높은 음부터 가장 낮은 음까지, 88명의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처럼 건반 위에서 신명나게 논다.

재즈 피아니스트 진보라. / 이수경 제공

재즈 피아니스트 진보라. / 이수경 제공

정통 클래식 음악은 깊고 격이 있지만, 함께 노는 신명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날 나는 재즈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 재즈 피아노의 즉흥성과 관객과의 호흡에서는 신명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의 연주는 신명의 극치다. 한때는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굿의 강렬함에 반해 굿판을 취재하러 찾아다니기도 했다. 굿을 하는 무당이나 구경꾼이 너 나 할 것 없이 어울려서 신명나게 놀고 나면, 누가 굿의 덕을 입었는지 따질 필요도 없이 하나가 된다. 음악이든 굿이든, 함께 신명나게 잘 놀아야 한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정교한 진보라의 즉흥연주는 피아노 건반 88개를 가지고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진보라의 연주는 테크닉이 다양하고, 즉흥연주에서도 진보라만의 법칙이 느껴진다. 몇 년 전, 사물놀이와 함께하는 즉흥연주 공연을 본 적이 있다. 합주자와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가며 연주에 몰입하는 진보라를 보며, ‘관객의 숨소리도 본인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보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공연은 누가 굿의 덕을 입었는지 따질 필요도 없이 하나가 되는 굿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진보라는 공연보다 방송을 통해 얼굴을 드러냈다. 예쁘고 순수한 외모는 연예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반가움보다 실망이 앞섰다. 피아노 하나에만 집중해도 성공할 사람이 연예인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 거로구나… 왜 자꾸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리는 걸까… 대중이 재즈 피아노 신동 진보라에게 갖는 오해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진보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녀의 방송활동이 왕성해지는 것과 동시에 정비례의 속도로 식어가고 있었다.

진보라를 다시 주목하게 된 건 2014년, 한 TV 프로그램을 통하여 태국과 미얀마 국경에 있는 난민촌의 고아원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모습을 본 날이었다. 아이들과 먹고 자고 이야기하며 악기를 가르치는 진보라의 모습에서 ‘마음의 소통’을 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악기 연주보다는 따뜻한 마음을 주는 진보라의 품에 안기고 싶어했다. 고아원의 아이들을 안아주며 진보라가 건넨 한마디.

“웃지 않아도 돼. 울어도 상관없어.”

그녀의 곡 <사막의 폭풍>이 떠올랐다. TV에서 이라크 전쟁 소식을 보다가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울면서 작곡했다는 곡은 17세 소녀의 눈에 비친 폭풍 같은 전쟁터의 모습이, 전쟁에 대한 안타까움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지는 곡이다. <사막의 폭풍>을 작곡한 17세 소녀는 11년 뒤 미얀마 난민촌에 가서 전쟁고아들과 음악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합주. 미얀마 난민촌에 울려퍼지는 아리랑…. 꺼져 있던 관심의 불이 다시 살아났다.

진보라와 얼굴을 마주하게 된 건 두 달 전이었다. TV 생방송에 함께 출연하게 되면서 매주 그녀를 만나게 되었지만, 13년 전 당신이 16세 소녀일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노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좀 지켜보고 싶었다.

가까이서 지켜본 진보라는 좀 ‘특이한’ 사람이었다. 모든 게 궁금하고, 신기하고, 배우고 싶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순진한 척하는 걸까, 색안경을 쓰고 봐도 그게 아니다. 백지 같은 순수함이 풍긴다. 어느 날 우연히, 진보라의 어머니를 만나서 얘기 나눌 기회가 생겼다. 한때 연극계의 주목을 받았던 배우 이수경. 그는 진보라보다 더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섯 살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50을 넘긴 여성도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표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닮은 모녀의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다.

함께 포즈를 취한 엄마와 딸. 외모도 닮았지만 마음이 더 많이 닮은 모녀다. / 박상미

함께 포즈를 취한 엄마와 딸. 외모도 닮았지만 마음이 더 많이 닮은 모녀다. / 박상미

<엄마, 이수경 이야기>
1979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안양 <극단 80>에서 활동했고,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졸업했다. 수원예술극장에서 활동하며 1984년 연극 <망나니>의 주연으로 전국 연극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1984년부터 실험극단에서 활동하면서 배우 최민식씨와 함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결혼 후 아이와 함께 노는 건 무대에서 맛보지 못한 재미와 보람이 있었다. 연기를 그만두었지만, 후회해본 적은 없다.

가정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즐거움이 컸다고 해석하면 될까요.
“보라와 함께 내가 만든 소품을 가지고 역할놀이를 하고, 아이와 함께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었어요. 집에 있는 유리컵, 쌀 등 모든 소품은 아이의 시청각을 자극하는 감성놀이 장난감이 될 수 있으니까요. 지금도 예쁜 그림을 보면 보라 방 벽에 붙여 놓아요. 좋은 창작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으니까.”

인생이 바로 연극무대군요. 집이라는 실험무대에서 아이와 함께 실험극단을 만든 거네요. 신인배우의 재능을 발굴해주는 선생님 역할을 하신 거고.
“아, 그 표현 맘에 들어요. 소품 하나도 신인배우가 선택하고 정해진 용도에 관계없이 가지고 놀게 했어요. 아이가 놀이에 참여하도록 유도만 했죠. 보라는 모든 놀이도구에서 ‘소리’를 발견할 때 즐거워했어요. 유리잔을 부딪치고 던지고 놀아도 야단치지 않았어요. 아이는 사물에서 소리를 발견하고 있었거든요. 청각이 발달한 것 같아서 3살 때부터는 피아노, 그 후엔 바이올린, 장구를 배울 수 있게 도와줬어요. 피아노를 조금 배웠을 무렵부터 보라는 노래를 듣고 바로 연주하고, 분위기에 따라 바꿔 연주하고 상황에 맞는 곡을 만들어 연주했어요. 청음이나 작곡 능력, 특히 즉흥연주 능력은 타고난 것 같았어요. <신날 때 연주하는 Let it be>라는 곡을 만들어 연주하길래 물었더니, 가족끼리 외출할 때 신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더군요. 비가 와서 소풍 못 갔을 때 슬픈 마음은 <비오는 날 슬픈 마음의 Yesterday>, 냉면이 먹고 싶은 날은 <냉면 먹고 싶은 마음>과 같은 곡으로 만들어 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의 재능을 살려주는 교육방식에 대해 고민했어요.”

보라씨가 중2 여름,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선택했는데요. 어려움은 없었나요.
“저는 진짜 하고 싶은 게 진짜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보라가 온종일 피아노 생각만 나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공감했어요. 독창성이 생명인 문화·예술교육 분야에서도 표준화된 교육시스템은 한계가 있어서 홈스쿨링을 택했죠. 하지만 본인의 확고한 의지와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해요. 더불어 아이의 교육·생활 관리를 가족이 다 떠안을 수 있는지, 세심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홈스쿨링 이후에 사회에 편입될 때 겪을 문제도 생각해야 돼요.”

미국 버클리 음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한 후에 입학을 안 했어요. 중·고등 과정을 검정고시로 했으니 학연·지연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보라씨는 아직 어린 나이니까 필요성을 못 느꼈어도 부모님 마음은 달랐을 것 같아요.
“보라는 음악교육을 받아서 음악을 한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CD를 틀어놓고 CD 속 연주자들과 합주를 통해 스스로 배워가며 음악을 연주했어요. 지난 10여년간 수많은 즉흥연주 활동을 통해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대학에서 음악을 지도받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았어요. 보라가 선택한 일이 보라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겠죠. 예술계에서 학연·지연을 따지는 게 너무 이상해요. 그게 예술적 독창성과 무슨 상관이 있죠?”

딸 진보라가 가장 자랑스러웠을 때는 언제인가요.
“해외공연 가면 언어도 안 통하는 외국인들이 더 감동받는 것 같아요. 2012년 콜롬비아 포파얀 공연 때 첫 곡 연주가 끝나자마자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쳐줬어요. ‘I Love Gene Bora’를 외쳤을 때 가슴이 뭉클했어요.”

재즈 신동이라 불리는 진보라를 키운 건 어머니의 창의적 교육방식 덕분인 것 같아요. 후배 엄마들에게 조언을 해주세요. 집이라는 무대에서 어떤 무대감독이 되어야 할지.
“어린 엄마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뭔지 아세요? 대충 보고 버릇처럼 말하는 칭찬입니다. 사랑으로 잘 지켜보고 아이의 장점을 발견해주는 진심이 담긴 칭찬이 아이의 미래가 됩니다.”

<딸, 진보라 이야기>
1987년에 태어나 3살부터 피아노를 쳤다. 2001년 12월 한전 아츠풀 센터 재즈 콩쿠르 고등부 대회에서 1위를 하며 이름이 알려졌다. 중학교를 자퇴한 덕분에 고등부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그 후 매년 15회 이상의 단독공연을 하고 방송활동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국악과 재즈, 제3세계 민속음악을 접목한 에스닉 재즈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는 ‘보라표 음악’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외국 재즈 밴드, 국악 연주자, 인도 라가 음악가, 티베트 명상음악가, 남미 퍼커션 연주자와 즉흥연주를 통해 음악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교복 입고 친구들과 학교생활의 재미를 누리지 못한 아쉬움과 배움에 대한 갈증에 시달린다. 온종일 교복을 입고 앉아 피아노를 치고, 울다가 잠이 든 날도 많았다. 여전히 초·중등생이 하는 학습지를 받아서 수학문제를 풀기도 하고, 최근에는 중국어 학습지도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는 경희대에 가서 인문학 강의를 청강하고, 이화여대에 가서 영어 강의를 듣기도 한다. 16살부터 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직장에도 다녀본 적이 없다.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해야 하는 아침방송 고정 진행자가 되었을 때 무척 설레고 기뻤다. 마치 매일 학교에 등교하는 긴장감이 생겼다.
혼자서 피아노만 치는 삶에서 새벽에 출근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방송을 통해서 사회와 대화를 한다. 새롭게 만나는 모든 것은 진보라에게 음악의 소재가 된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진보라 음악의 한 장르다.

먼저 사과부터. 재즈 피아노를 통해서 유명해지니까 연예계로 진출하고 싶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옆에서 지켜보니 그게 아니야.(웃음) 저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죠.
“제 곡 중에 <워킹 더 캣(Walking the cat)>은 미스코리아 경선에서 굽이 높은 힐을 신고 워킹하는 60여명의 미녀들의 모습을 보고, 두 발로 걷는 고양이의 모습을 연상해서 작곡한 곡이에요. 방송을 진행하다가 만나는 모든 장면이 제겐 소재가 되니까 새로운 일은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요. 자극을 받아야 영감이 떠오르니까요. 첫 도전, 처음 마시는 공기가 내 음악의 지평을 넓혀줘요. 그리고 대중들의 평가는 오해든 비난이든 제겐 다 필요해요. 저는 대중과 소통하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거니까요. 음악은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감정은 아주 소중하고, 잘 가꾸어야 하는 것이죠.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까 상대와도 좋은 감정을 교류하고 싶어요.”

진보라를 질투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제일 흠집 내기 쉬운 게 진보라의 학력인데. 버클리 가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 본인한테 직접 들읍시다.
“연주만이 아니라 창작도 하니까 늘 긴장해야 돼요. 그래서 알 수 없는 심한 두통에 시달려요. 진통제를 맞아도 안 들을 때가 많아요. 내가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달리구요. 정규학교를 안 다녔기 때문에 오는 강박이 있어요. 그래서 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버클리 음대에도 지원했죠. 새로운 세상을 접해보고 싶었고, 학창시절 추억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버클리 장학생이 되고, 미국 현지에 있는 문화재단에서 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얼마 후 브라질에 갔다가 마음이 바뀌었어요. 촬영 도중 현지 스태프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라틴음악과 보사노바를 내 느낌으로 연주해서 들려주었는데, 정말 좋아하면서 밤에 호텔까지 찾아와서 연주를 해달라고 했어요. 거기서 버클리로 가야 했는데, 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학교에서 음악교육을 받는 것보다 해외공연을 통해 다른 문화를 접하고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게 훨씬 더 의미가 있다고 느낀 거죠.”

아빠는 매니저로, 엄마는 진보라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코디네이터로 24시간을 함께했지만 이젠 완전히 독립했다. 2년 전, 이수경씨는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가 기적처럼 깨어났다. 엄마가 병원에 누워 있는 6개월 동안, 피아노 건반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때 만든 곡이〈Yes, mom. 그래요, 아빠〉다. 곡을 들으며 진보라에게서 깊은 아픔이 지나간 흔적이 느껴졌다.

“연주할 때도 우느라 건반을 잘못 누르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실수도 곡의 일부죠. 종양이 시신경을 눌러서 엄마 눈에 이상이 왔어요. 엄마가 사진 찍기 싫어하는 이유가 눈 때문인지 몰랐어요. 눈 때문에 엄마가 사진 찍는 걸 피한다는 걸 알고 마음이 아팠어요. 언니, 우리 엄마 정말 예쁘죠? 천사 같지 않나요?”

엄마와 딸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외모도 닮았지만 마음이 더 많이 닮은 모녀. 이들에게 세상은 무한대로 넓고 신기한 실험무대다. 이젠 진보라의 무대감독 이수경이 아닌, 새로 태어난 신인배우 이수경이 되어 인생의 무대에 섰다. 세상의 잠든 마음들을 깨우는 진보라의 즉흥연주에 맞추어 어머니도 마음껏 춤을 추시라.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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