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뮤지컬 <레베카>·<벤허>·<오페라의 유령>
강의를 할 때면 항상 좋아하는 감독이 누군지 묻는다. 연령대와 전공 여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빠지지 않는다. 현대 일본영화와 고전 스릴러 영화라는 간극은 있으나 자신만의 스타일이 분명해 마니아층이 두텁다. 이들의 대표작들이 요즘 무대극으로 상연 중이다.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이복 네 자매의 잔잔한 일상과 바닷마을 풍광이 전부인데 연극으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화의 생명인 ‘자연’을 무대에서 과연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해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영화와 다르다. 바닷마을이 보이지도 않고 아름다운 고택도 없다. 영화 속 실제 이미지들은 연극적인 언어로 치환됐다. 바닷마을은 서라운드 음향효과와 배우들의 동선으로, 아름다운 고택은 무대 바닥에서 승강기처럼 오르내리는 미닫이문 가득한 장방형 마루로 변신했다. 영화를 그대로 계승한 것은 주요 캐릭터들의 이미지와 서로를 배려하고 보듬어내는 정서, 그리고 거대한 매실나무 한그루다.
‘매실나무 아래서’라는 부제가 필요할 정도로 무대 한켠에 거대하게 자리한 매실나무는 부모에게 방치되거나 버려져 자기들끼리 성장한 이복 네 자매의 단단한 뿌리를 상징한다. 매실나무에서 매실을 따 매년 담그는 연도별 매실주는 이들이 서로를 보듬고 또 가끔은 밀어내는 기폭제가 된다. 잔잔하면서도 격렬한 일상을 살아온 네 자매를 지켜보는 상징적 오브제이기도 하다. 이준우 연출은 이를 위해 실제 나무를 무대 위에 들여놓았다. 수종이 매실은 아니지만, 진짜 나무가 주는 에너지가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뮤지컬 <레베카>는 앨프레드 히치콕 영화 <레베카>(1940)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논 레플리카(non-replica) 라이선스 작품이다. 노래와 안무 등 일부는 원작을 반영하고 프로덕션 디자인은 한국 창작진들이 재해석했다. 2013년 한국 초연 이후 꾸준히 상연돼 올해가 일곱 번째 시즌이다. 뮤지컬이 인기를 끌면서 영화도 재조명됐다.
극중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가 아내 레베카를 잃고 유랑하는 막심 드윈터와 결혼해 맨덜리 저택에 들어가 벌어지는 이야기다. 레베카는 직접 등장하지 않으면서 모든 등장인물의 공포이자 애증의 존재로 극 전체를 지배한다. ‘나’ 중심인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나’와 맨덜리 저택의 집사 ‘댄버스 부인’의 갈등을 더 부각시킨다.
발코니 장면이 대표적이다. 무대 안쪽에 깊이 자리한 바닷가 전망의 발코니가 빠른 속도로 무대 전면에 등장하면서 댄버스 부인과 ‘나’의 격렬한 극고음 이중창이 펼쳐진다. 이때 부르는 긴 버전의 ‘레베카’는 작품 전체에 리프라이즈(reprise)되는 대표 넘버다. 영화 속 발코니 장면이 뭉근한 위협과 슬픔이었다면 뮤지컬에서는 강력한 도전과 저항을 담고 있다. 한국 창작진들의 기술적 보완으로 생동감 넘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장면을 완성했다. 영화를 뛰어넘은 화재 장면도 압권이다. 이중막 사이 앙상블들의 고통스럽고 일사불란한 안무와 그 위에 영사되는 불타오르는 저택은 실제 불이 붙은 소품을 들고 등장하는 배우들까지 가세해 실감효과를 높인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한국 창작 뮤지컬 <벤허>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올해가 세 번째 시즌으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벤허>(1959)도 연상된다. 기원전 1세기 로마와 유대인들의 긴장관계를 다룬 서사는 영화보다 구체적이다. 로마 집정관의 부패를 상징하는 남성 무희들의 강렬하면서 유혹적인 군무는 영화 <벤허>마저 잊게 만든다.
하이라이트는 전차 경주 장면이다. 로보틱스 말 여덟 마리가 회전무대를 통해 역동한다. 영상미로 속도감을 부여했으나 그래봤자 고정돼 있는 로봇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의 긴박감을 기대했던 관객들이 아쉬움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수중 신(Scene)은 영화를 능가한다. 격랑과 노 젓는 장면에 묻혀 빠르게 지나갔던 영화 속 장면을 무대에서 실감나게 구현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반대로 뮤지컬이 유명해져 영화로 제작한 경우다. 영화 <오페라의 유령>(2004)은 뮤지컬의 이미지와 캐릭터를 그대로 갖고 오면서 역동적인 카메라로 무대에서는 상상만 했던 공간을 보여준다. 뮤지컬 제작자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영화 제작에도 참여해 전반적인 프로덕션 디자인을 끌어왔지만, 지나친 친절함 탓에 상상력이 단절됐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상징적인 샹들리에 추락 신 역시 무대에서 관객 머리 위를 지나는 역동성과 영화 속의 사고 장면은 천지 차이다. 매회 관객과 창작진들이 주고받는 감정의 기복을 공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영화는 호불호가 갈린다. 무대극이 주는 신비감은 사라지고 말았다.
무대극화는 박제된 영화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작업이다. 동시대의 시선과 해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 영화 마니아들의 고정관념을 잃을 수 있지만, 대신 시대와 호흡하는 생생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네 작품 모두 11월 19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이후 2024년 2월 4일까지 대구 투어 공연에 나선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