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살아남아야, 서울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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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고유성을 담은 책 읽으며 ‘지역소멸’ 고민해보는 추석 어때요

책 <할머니의 그림 수업>의 주인공인 제주 선흘마을 할머니들 / ⓒ달여리

책 <할머니의 그림 수업>의 주인공인 제주 선흘마을 할머니들 / ⓒ달여리

수도권 집중이 심해지고 지역소멸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대로 세대가 바뀐다면 언젠가는 고향으로서 지역의 의미마저 희미해져 갈지도 모른다. 또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탈서울을 꿈꾼다. 모든 시간이 소비로 대체되는 서울의 삶에 지쳐 다른 삶을 모색하는 이들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지역은 절박한 위기의 현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의 틈을 여는 공간이기도 하다. 서울이 아니라는 공통분모를 토대로 각 지역의 고유성을 담고 있는 책들을 소개한다.

할머니의 그림 수업(최소연 지음·김영사)

부제는 ‘그림 선생과 제주 할망의 해방일지’다. 평균나이 87세인 제주 선흘마을의 할머니 8명이 그림을 배우는 이야기를 담았다. 지은이인 최소연 예술감독은 2021년 전개한 드로잉 프로젝트 <할머니의 예술창고>를 계기로 마을 할머니들에게 그림을 권하고 가르치게 됐다.

집에 모나미 볼펜 한 자루 찾기 어려울 만큼 그림과 거리가 멀었던 할머니들의 일상에 그림이 들어왔다. 시작은 홍태옥 할머니였다. 마당에서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던 할머니가 빈 이젤 앞에 서서 “나도 기려(그려)볼까” 하며 목탄을 집어들었다. 그다음은 강희선 할머니였다. 홍태옥 할머니의 그림 수업을 구경하러 온 강희선 할머니가 이번에는 빈 이젤 앞에 섰다. 그렇게 온 동네에 그림 수업 소문이 났고, 할머니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에 대한 할머니들의 열정은 수줍으면서도 진지하다. 지은이가 할머니 집에 들어가 그림 좀 그리셨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어신게(없다), 암것두 안 핸(아무것도 안 했다)” 하며 손사래를 친다. 커피를 마시며 한창 수다를 떨고 나서야 슬그머니 방석 밑에 깔아둔 그림들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게 그림이 될까?”, “겐디 저 낭을(나무를) 종이에 어떵(어떻게) 담을랑게(담지)?” 하며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한다. 할머니들은 항상 그림을 생각한다. 일상에서 소재를 찾고 영감을 얻는다. “한의원 가서 침 맞고 완(왔는데) 요자기(요전에) 염소가 아롱아롱(아른아른해서) 소를 하나 기려서(그려서) 연습을 해야 할 텐데 어떵 기려(어떻게 그려)?” 길을 가다가 염소 벽화를 본 강희선 할머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인 소를 벽화로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림과 글을 함께 엮은 할머니들의 작품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어떤 작품들은 예상치 못한 울림을 준다. ‘엄마한테 보내는 그림, 보리콩’에는 오가자 할머니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이 담겼다. 강희선 할머니의 ‘4·3 부로코’에는 브로콜리를 뽑아 그림을 그리다가 불현듯 4·3에 세상을 떠난 가족을 떠올리는 슬픔이 담겼다.

책에는 할머니들의 그림이 함께 수록돼 있다. 할머니들의 작품을 통해 관광지가 아닌 삶의 터전으로서 제주를 좀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서울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김희주 지음·일토)

탈서울을 꿈꾸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제목이다. 서울에서 15년 동안 기자, 기획자, 프리랜서 에디터, 학원강사, 출판사 대표 등으로 일해온 지은이가 강원도 양양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담았다.

이주 결정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지은이는 남편과 떠난 강원도 여행 중에 우연히 양양의 아파트 모델하우스 광고를 보게 됐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모델하우스였는데, 그날따라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3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모델하우스를 구경한 후, 그 자리에서 계약까지 해버렸다. 그야말로 충동구매였다. 지은이는 대학 입학 후 하숙을 시작으로 옥탑방을 비롯해 2년에 한 번씩 서울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살았다. 결혼 후에는 남편과 공공임대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서울에서 집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막연하지만, 언젠가는 서울을 떠나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줄곧 제주를 꿈꿔왔지만, 덜컥 가게 된 곳은 양양이었다.

입주까지 남은 2년 동안 양양에서 무엇을 할지 찾아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지은이는 “일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서울이 아닌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질문했을 때 답이 없다는 게 두려웠다”고 말했다. 인구 3만 명이 채 안 되는 시골에서 글 쓰고 기획하는 일을 줄곧 해온 지식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잘 보이지 않았다.

정착 과정도 쉽지 않았다. 이주를 준비하면서 목공을 배운 남편이 공방을 열었고, 지은이는 공방일을 도우면서 프리랜서 에디터로 일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닥치면서 남편의 공방은 문을 닫았다. 어렵사리 공방을 계속 이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정작 양양에 온 이유를 잃게 될 판이었다. “육체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일하면서 서울이 아닌 곳에서, 일이 최우선이 아닌 곳에서 살기 위해 이곳에 온 걸 잊어가고 있었다.” 지은이는 서울에서의 마음과 양양에서의 마음을 견주어봤다. “내가 ‘허스키’라고 부르는 눈 쌓인 설악산과 그러데이션이 정말 예쁜 이름 모를 꽃들이 눈을 맑게 해준다. 물론 이런 건 서울에도 있었을 거다. 북한산은 얼마나 예쁠 것이며 서울의 자랑인 한강은 또 얼마나 보기 좋을 것인가. 하지만 그것들을 지켜보며 살 마음이 그때 거기에는 없었을 뿐이다.”

이후 지은이는 양양군 도시재생센터에서 일을 시작했다. 지은이에게 지역소멸은 이제 삶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는 “이제 나의 문제가 된 소멸을 향해가는 지역에서의 삶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보다 절실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소설 목포(박생강 외 지음·아르띠잔), 소설 부산(곽재식 외 지음·아르띠잔)

<소설 목포>와 <소설 부산>은 지역을 주제로 한 테마소설이다. <소설 제주>, <소설 도쿄>, <소설 뉴욕> 등도 시리즈로 나왔다. 작품집이 지역과 문화, 사람이 어우러지는 장이 되길 바라는 기획의도를 담았다.

최근 출간된 <소설 목포>는 오래된 건물과 풍경을 간직한 도시인 목포를 배경으로 8명의 작가가 그려낸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싱가포르에서 찾아온 인스타그램 친구의 부탁으로 아이유가 출연한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촬영지인 목포 여행에 가이드로 따라나선 이야기, 민원 안내 콜센터 안내원으로 일하며 알게 된 동료가 노조 활동을 하다 해고되자 미안한 마음에 동료의 고향인 목포를 찾아간 이야기 등을 담았다. <소설 부산>에는 부산이 고향이거나 부산을 터전으로 활동하는 작가 등 7인이 쓴 작품이 담겨 있다. 광안대교, 해운대, 남포동거리 등 잘 알려진 부산의 생기 넘치는 명소가 소설의 배경이다. 해안도시의 화려한 개발 뒤에 숨은 그늘, 불안, 허무를 담은 작품들도 수록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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